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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장 설교
 밤중소리  11-06 | VIEW : 4,554
■ 차 례 제 11 장 104) 시험에 든 세례요한 (1절~6절) ................................................... 7 105) 선지자 세례요한의 위대성 (7절~11절) .............................................. 11 106)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 천국 (12절~15절) ........................................ 15 107) 이 세대의 비유 (16절~19절) ...................... 19 108) 권능을 보고도 믿지 않는 죄 (20절~24절) ........................ 23 109)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신 슬기 (25절~27절) ................................................... 27 110) 예수님의 인생 초대장 (28절~30절) ..................... 31 111)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29절~30절) .......................................... 35 제 12 장 112) 안식일의 주인이 되신 예수님 (1절~8절) ............................................ 39 113) 안식일의 참 의의 (9절~13절) ................................. 43 114) 자기를 나탄내지 아니하신 이유 (14절~21절) ........................................ 47 115) 사탄의 분쟁 (22절~30절) ........................... 51 116)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성령 훼방죄 (31절~33절) ...................... 55 117) 말에 대한 심판 (33절~37절) .......................... 59 118) 표적을 구하는 잘못된 신앙 (38절~45절) .......................... 63 119) 천국민의 새로운 가족 관계 (46절~50절) ............................................. 67 제 13 장 120) 씨뿌리는 비유 (1절~23절) ................................. 71 121) 복 있는 귀 (10절~17절) .................................. 75 122) 복 있는 눈 (10절~17절) ............................................ 79 123) 함께 자라는 알곡과 가라지 (24절~30절) .................... 83 124) 천국의 생명력 (31절~35절) ....................................... 87 125) 보화를 사라 (44절~46절) ................................... 91 126) 물고기 비유와 서기관의 책임 (47절~52절) ................................................. 95 127)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53절~58절) ...................................................... 99 제 14 장 128) 세례요한의 순교 (1절~12절) ......................... 103 129) 광야의 잔치 (13절~21절) ................................107 130) 고난 중에 찾아오시는 주님 (22절~27절) ................................ 111 131)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28절~36절) .......................................... 115 제 15 장 132) 헛되이 경배하는 유전 (1절~11절) ............................................ 119 133)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무엇인가 (11절~20절) ................................. 123 134) 천부께서 심지 않은 것은 뽑히리라 (12절~14절) ..................... 127 135)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 (21절~28절) .................................. 131 136) 7병2어의 기적 (28절~39절) .................................. 135 제 16 장 137) 하늘로서 온 표적 (1절~4절) .............................. 139 138) 삼가야 할 누룩 (5절~12절) .............................................. 143 139) 베드로의 신앙고백 (13절~20절) ............................................. 147 140)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21절~23절) ............................................... 151 141) 주님을 따를 자의 자격 (24절) ................................................ 155 142) 생명을 얻는 비결 (23절~26절) ............................................ 159 143)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때 (27절~28절) ................................ 163 제 17 장 144) 변화산에서 일어난 일 (1절~13절) ............................. 167 145) 겨자씨 만한 믿음의 능력 (14절~20절) .......................... 171 146) 예수님이 내신 성정세 (22절~27절) ................................ 175 제 18 장 147) 천국에서 큰 자 (1절~4절) ...................................................... 179 148) 실족케 하는 자의 죄 (5절~10절) ......................... 183 149) 잃은 양을 찾으시는 예수님 (12절~14절) ................................ 187 150) 범좌자에 대한 교회의 태도 (15절~18절) ................................ 191 151) 합심 기도의 능력 (19절~20절) ................................ 195 152) 용서의 원리 (21절~35절) .......................................... 199 153) 죄와 빚 (23절~35절) ............................................ 203 제 19 장 154) 이혼에 관한 교훈 (1절~9절) ........................................................... 207 155) 주님이 말씀하신 독신 생활 (10절~12절) ............................................... 211 156) 어린이에게 축복하신 예수님 (13절~25절) .............................. 215 157) 영생을 놓쳐 버린 청년 (16절~22절) .............................. 219 158) 부자와 천국 (23절~30절) .............................................. 223 제 20 장 159) 포도원의 품군 (1절~16절) ............................................. 227 160) 누가 높으냐 (17절~28절) ................................................ 231 161)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29절~34절) ............................................ 235 제 21 장 162) 주님이 쓰시는 그릇 (1절~11절) .......................................... 239 163) 내 아버지의 집 (12절~13절) ............................. 243 164) 성전 청결의 의미 (12절~17절) .......................... 247 165)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18절~22절) ............... 251 166)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왔느냐 (23절~27절) ...................................... 255 167) 누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었나 (28절~32절) ......................... 259 168) 열매 맺는 백성이 받을 하나님의 나라 (33절~46절) ......................... 263 제 22 장 169) 아들의 혼인 잔치 (1절~9절) ................................ 267 170)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입은 자 (10절~14절) ................................ 271 171)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 (15절~22절) ................................ 275 172) 부활에 관한 사두개인의 질문 (23절~33절) .......................................... 279 173)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34절~40절) ............................................ 283 174) 다윗의 자손과 메시야에 관하여 (41절~46절) ................................. 287 제 23 장 175)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책망 (1절~12절) ......................... 291 176) 천국문을 닫는 죄와 지옥 자식을 만드는 죄 (13절~15절) ................... 295 177) 잘못된 맹세와 율법의 더 중한 것을 버린 죄 (16절~24절) ............. 299 178) 탐욕의 죄와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죄 (25절~28절) ................... 303 179)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 죄 (29절~39절) ............................................. 307 제 24 장 180) 주 재림의 징조 (1절~14절) ............................... 311 181) 종말의 결정적 증거 (15절~28절) ............................................ 315 182) 주 재림의 모습 (29절~31절) .......................................... 319 183) 무화과나무의 비유에 나타난 종말 (32절~36절) ............................. 323 184) 노아의 때와 같은 세상 종말 (37절~39절) .......................... 327 185) 예비하고 있어야 할 주 재림의 날 (37절~44절) ................................ 331 186) 충성된 종과 악한 종 (45절~51절) ................................. 335 제 25 장 187) 지혜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의 비유 (1절~13절) ......................... 339 188) 착하고 충성된 종 (14절~23절) ...................................... 343 189) 악하고 게으른 종 (24절~30절) ............................................. 347 190) 양과 염소의 분별 (31절~46절) ................................................ 351 제 26 장 191) 옥합을 깬 여인 (1절~13절) ............................................ 355 192) 랍비여 내니이까 (14절~25절) .......................................... 359 193) 새 언약의 피 (26절~30절) ............................. 363 194)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31절~35절) .......................... 367 195)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36절~46절) ................................ 371 196)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하리라 (47절~56절) ............... 375 197) 사형 판결을 내린 종교 재판 (57절~68절) ......................... 379 198) 베드로의 실패와 회개 (69절~75절) ................ 383 제 27 장 199) 가룟 유다의 결국 (1절~10절) ............................ 387 200)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1절~14절) .......................................... 391 201) 바라바냐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냐 (15절~26절) ............................. 395 202) 희롱을 당하신 예수 (27절~31절) .......................................... 399 203) 시몬의 십자가 (32절) ............................. 403 204) 쓸개 탄 포도주 (33절~44절) .......................................... 407 205) 두 강도의 경우 (44절) ............................. 411 20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45절~49절) .......................................... 415 207) 찢어진 성소 휘장 (50절~56절) ............................. 419 208) 예수의 무덤 (57절~66절) .......................................... 423 제 28 장 209) 부활의 아침 (1절~10절) ............................. 427 210) 주님의 지상 명령 (11절~20절) .......................................... 431 ≈ 104 ≈ 시험에 든 세례 요한 (본문 : 마태복음 11 : 1 - 6) 서 론 : 세례 요한이 헤롯왕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옥에 갇힌 요한이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는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고 물었습니다. 이런 질문은 위대한 선각자요 오실 메시야의 증거자로써 분명히 의심에 찬 질문으로 그의 마음속에 걷잡을 수 없는 시험이 들게 된 증거입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이 같은 사명은 이미 이사야로 예언되었습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마2:3). 세례 요한도 이같은 자신의 사명을 스스로 알고 있었습니다. 요단강으로 사람을 보내어 “네가 누구냐”고 묻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고 말했습니다(요1:23). 그는 요단강에서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에 비둘기 같은 성령이 그 머리 위에 임하시는 것을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인했습니다. 그의 확인은 움직일 수 없는 체험에서 온 것입니다. 그는 자기 제자들을 향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고 증거했습니다. 이런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힌 후 시험에 든 것입니다. 1. 세례 요한이 시험에 든 이유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신앙이 돈독하고 체험과 증거를 가졌다 해도 시험에 들때가 있는 것입니다. 시험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요한의 경우는 예수님이 과연 메시야냐 하는 데 대한 의심에서 나온 시험이기 때문에 위험한 시험이었습니다. 그의 확신이 뿌리 채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 의심이 먹구름처럼 뒤덮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이런 시험은 그의 급작스런 환경의 변화에서 찾아왔습니다. 세례 요한은 어느 날 헤롯왕을 찾아가 그의 패륜에 대해 꾸짖었습니다. 이 책망으로 그는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러 날 옥에 갇혀 있는 중에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옥에서 풀려날 수 있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야관도 그 당시 유대인들의 그것과 다름없이 예수님이 영광의 메시야로 오셨음을 믿었으며 그가 메사야 왕국을 세우실 분이심을 믿은 것입니다. 그는 이런 왕국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랬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자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는 옥에서 정신적으로나 육신적으로 많은 고초를 받고 있는 가운데 사탄의 시험이 그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그는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메시야이신가? 그렇다면 왜 메시야 왕국이 임하지 않는 것일까? 자신이 겪는 이 어려움에서 왜 구원해 주시지 않는 것일까?’ 이런 의심이 세례 요한의 마음을 휘어잡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위기는 이처럼 어려움이 갑작스럽게 닥쳐왔을 때 어떤 결정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이 외적으로 나타나지 않을 때 찾아옵니다. 세례 요한이 시험에 든 원인을 두 가지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는 바른 메시야관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에 대하여 좀 더 깊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의 사명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일 뿐이요 그 일이 끝나면 그는 가장 영광스러운 방법으로 하나님께 가는 일입니다. 2. 시험은 왜 오는가? 성경은 우리가 시험에 드는 일에 대해 여러 가지로 경종해 주고 있습니다. (1) 시험은 기도의 생활이 중단되었을 때에 찾아옵니다. 주님은 산에 오르사 기도하실 때 제자들이 잠자는 것을 보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항상 기도하는 일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최상의 무기는 기도하는 일임을 그리스도인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시험은 욕심에 끌릴 때 찾아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라”고 했습니다(약1:14). 영적 생활을 못하고 육신에 끌려가는 생활을 하게 될 때 시험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이 원하는 정욕대로 살아갈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했습니다(갈5:24). (3) 시험은 부하려 할 때 찾아옵니다.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부정한 방법이나 비 신앙적인 방법으로 돈을 벌겠다고 생각하면 그 즉시 시험 속에 빠지게 됩니다. 기복 신앙에는 시험이 따르기 때문에 뜻을 이룰 수도 없거니와 더욱 큰 시험을 자초하여 침륜과 멸망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함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했습니다(딤전4:9-10). (4) 시험은 선 줄로 여길 때에 찾아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고전10:12). 선 줄로 생각하는 일은 사람의 교만입니다. 교만에는 그를 넘어지게 하는 시험이 따르게 됩니다. (5) 시험은 시련 중에 찾아오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벧전4:12-13). 세례 요한의 경우는 하나님의 시련 중에 찾아온 시험입니다. 시험이 찾아오면 확신도 변할 수 있습니다. 확신을 언제나 확신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확신이 되기 위해서는 항상 그 확신의 자리에서 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신앙적으로 점진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의 돌변적인 환경의 변화는 우리의 확신을 빼앗아 가고 우리의 믿음을 흔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견고하여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세월이 지나가다 보면 믿었던 것도 희미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의 처지에 결부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의도대로 되지 않을 때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신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결론 : 주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가서 보고 듣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고 하시면서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시험에 든 요한에게 대답하실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은 그의 행하시는 권능이십니다. 시험에 들어 있는 요한에게는 백 마디의 설교보다는 실증적인 증거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이 전하라고 하신 이 말씀은 시험에 들어 있는 요한에게 예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자신의 사명을 이룬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꺼이 순교의 제물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 105 ≈ 선지자 요한의 위대성 (본문 : 마태복음 11 : 7 - 11) 서 론 : 세례 요한에 대한 주님의 칭찬은 놀라웠습니다. 그는 비록 감옥에서 시험을 당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세례 요한의 사명이나 그의 인간성에 손상을 준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주님의 증거자로서 잠깐동안이나마 주님을 의심한 일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위신이 깎인 일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례 요한의 본래의 모습과 그의 위대한 사명을 알려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세례 요한의 선지자로서의 위대한 사명과 그의 인격을 칭찬해 주신 것입니다. 1. 왜 광야에 나갔더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복음을 외친 선지자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습니다. 이 때 유대와 예루살렘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그 때 왜 광야에 나갔더냐고 물으심으로 그들이 지난날에 광야로 세례 요한을 찾아가 세례를 받았던 일을 회상시켰습니다. 이 물음에서 주님은 두 가지 목적물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는 바람에 불려 흔들리고 있는 갈대였고 하나는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아마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시고 있는 그 곳은 갈대밭이 있었던 곳이며 때마침 그 갈대들이 바람에 보기 좋게 흔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 무리들 중에는 혹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어서 이 말씀을 하실 때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하시면서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그곳 광야에 갔었더냐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들에게 놀라운 상상력을 갖게 했음에 틀림 없었을 것입니다. (1) 주님은 과연 너희들이 광야에 나갔을 때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갔던 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에 제자들에게서 부정적인 대답을 끌어냈을 것입니다. 그러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지조 없는 삯군 선지자를 가리키신 것입니다. 삯군은 권세의 바람에 흔들입니다. 세례 요한은 권세자에게 아부나 하는 지조 없는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리켜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책망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는 헤롯왕에게도 굴복하지 않고 그의 패륜적인 부도덕한 생활을 질책했습니다. 옛날에 지조가 없었던 사울 왕은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므로 오히려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던 것입니다. 금전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도 있습니다. 발람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알면서도 왕이 보낸 값진 선물과 그에게 약속한 명예와 영광으로 인하여 그의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습니다. 선지자가 권세나 금전의 바람에 흔들려서는 선지자적은 사명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권세자들이 두려워 그들에게 아첨하므로 불의에 대하여 입을 다문다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될 것입니다. (2) 주님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광야에 간 것이 아니라면 그러면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이 주님의 말씀을 들고 있었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은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 요한이 입고 있었던 옷을 상상했을 것입니다. 그의 몸엔 부드러운 옷이 걸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보기에도 딱딱하고 거친 옷을 입고 있었던 그의 모습을 머리에 그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이런 사람은 세속적인 선지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세상과 짝하는 선지자들입니다. 세상 풍습을 적당히 따라가는 선지자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같은 부드러운 옷을 입은 하나님의 종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24:48-51). 사람들로 풍부한 상상력을 상기시킨 이 말씀으로 듣고 있었던 그 많은 사람들은 세례 요한은 결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도 아니며 부드러운 옷을 입은 선지자도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나게 했을 것입니다. 2.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처럼 반문 법을 되풀이하시면서 결론적으로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고 하심으로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을 찌르신 것입니다.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주님의 길을 예비한 선지자였기에 그의 사명은 모든 선지자 가운데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사명자였던 것입니다. 그는 마치 엘리야와 방불한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주님은 말라기 선지로 예언한 말씀,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 사람, 세례 요한에 대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칭찬하신 것은 그가 인류의 메시야를 증거하며 소개하는 위대한 사명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큰이라고 하신 표현은 그의 인간성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사명을 의미해 주신 말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 끝에 천국 백성들의 놀라운 축복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 대하여 혼란을 야기시키지 않으려면 이 말씀은 인간적인 위대성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천국 백성들이 누리는 축복을 표현하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 백성들의 축복은 세례 요한이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큽니다. 천국에서는 아무리 작은 자라도 은혜 아래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구약의 율법 아래 속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국 백성들은 온전히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다만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그 뿐 아니라 천국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선지자적인 사명만을 가지고 일한 하나님의 사역자였습니다. 모세도 그러했습니다.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히3:5). 그리고 천국 백성들은 온전히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다만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그뿐 아니라 천국 백성들은 그 마음에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심으로 이것은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성령의 내주가 아니라 외적으로 역사한 사역자였습니다. 결론 : 우리는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선지자의 말을 들으려고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선지자의 말이란 하나님의 언약의 비밀을 선포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 언약의 비밀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세속적인 말은 세상에도 많이 있습니다. 정치적인 말이나 철학적인 말도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기복적인 말도 많습니다. 이런 것들을 들으려고 선지자를 찾아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세례 요한보다 더 축복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우리는 세례 요한보다 더욱 크게 그리스도를 세상에 외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106 ≈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 천국 (본문 : 마태복음 11 : 12 - 15) 서 론 : “천국은 침노를 당하노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그 해석이 다양합니다. 주님은 여러 가지 비유로 천국을 말씀하셨지만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는 말씀은 참으로 묘하신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침노란 말은 무력으로 쳐들어가 강탈한다는 뜻인데 천국이 이처럼 침노를 당한다고 하셨으니 도대체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그 해석이 구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는 뜻 우리는 먼저 주님께서 왜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고 하셨는가에 대하여 그 말씀의 뜻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천국은 이 세상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이 아담의 후손으로 육의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라면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적 자손만이 그 자격자가 됩니다. 이 두 나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서로 건너갈 수도 없고 건너 뛸 수도 없는 나라입니다. (2) 천국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순탄하게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 나라에 들어가기까지는 철통같은 장애물들이 가로 막혀 있습니다. 죄라고 하는 장벽이 높이 솟아 있습니다. 끊어 버리기 어려운 세상 줄이라고 하는 끄나풀이 얽매어 있습니다. 부서져야 할 교만이 우뚝 서 있습니다. 사탄과 그 졸병들이 아무도 그 곳에 들어갈 수 없도록 겹겹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뚫고 들어간다는 일은 참으로 침노하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천국은 오직 그리스도를 소유자만이 들어간다.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뿐입니다. 사탄이나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막을 수 없는 한가지 길이 있는데 그 길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그의 사역을 완수하기까지는 이 길이 열려지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그의 최후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바치실 때 “다 이루었다”는 말씀과 함께 성소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성소의 휘장이란 하나님께 가는 길이 막힌 죄악의 담을 말합니다. 그것이 한 가운데가 찢어지면서 성소 한 가운데로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말씀했습니다(히10:19-20). 이 길만이 천국을 침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② 천국에 침노할 수 있는 무기란 진리입니다. 이 무장을 갖추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세상에 속한 모든 사탄의 권세에서 자유를 주는 유일한 하나님의 병기인 것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8:31-32). 진리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데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진리가 되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요1:1). 그리스도인들이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 대항하여 싸우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성령의 검이라고 했습니다(엡6:10-17). 이 무기를 가지고 사단의 권세와 불의한 세력과 싸우지 않으면 천국에 침노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천국은 오직 십자가로만이 침노할 수 있다. 십자가는 천국으로 침노해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누구든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십자가만 통하면 누구든 천국에 침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한 일이라고는 한번도 해보지 못한 강도범도 십자가를 통해 천국에 침노할 수 있었습니다. 부잣집 대문간에 평생 동안 거지 생활밖에 못해온 거지 나사로도 이 통로를 통하여 천국에 침노했습니다. 아무리 그가 한 나라의 제왕이라 할지라도 이 십자가의 통로가 아니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의 인간이 죽었다는 표입니다.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죽어야 자신의 죄 값을 치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도 육체의 단순한 죽음인 것이 아니라 영과 육이 아울러 불붙는 유황불 못, 둘째 사망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그의 생명은 끝장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우리 죄인들이 죄에 대하여 죽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습니다(롬6:6). 십자가는 사망 권세를 이긴 표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사람들은 그의 부활에 연합되어 다시 살리심을 받는 것입니다. 이제는 죄에 대해서는 죽었고 의에 대해서는 살았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사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지어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6:10-11). 이런 사람만이 사단의 견고한 죄악의 아성을 파헤치고 천국에 침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천국은 하나님과 화목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 곳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그 아들의 십자가만이 가능합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다”고 했습니다(엡2:16). 4. 천국은 새사람만이 침노할 수 있다. 모든 인간들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천국을 바라보는 눈이 감겨져 있으므로 그 곳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가는 길조차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천국을 바라볼 수 없는 사람은 천국을 침노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아무나 바라볼 수 있도록 존재하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드신 하나님의 비밀한 곳입니다. 이 하나님의 비밀한 곳을 볼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의 심령의 눈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심령의 눈은 새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속 사람의 눈입니다. 새 사람이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새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3:3). 결론 : 결론적으로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5:24).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말씀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들이 천국으로 침노해 들어간 것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그리고 그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튼튼히 잡고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천국을 침노한 사람들임을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107 ≈ 이 세대의 비유 (본문 : 마태복음 11 : 16 - 19) 서 론 : 요한복음1:5절 말씀에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복음의 빛이 온 세상에 비취지만 어두움에 잠긴 세상상 사람들은 그 빛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회개할 줄 모르고 복음을 받아 드리지 않는 이 세대를 향하여 주님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곡을 해도 가슴을 치지 아니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회개를 역설하면서 이 세대를 꾸짖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마3:11). 그러나 이 같은 요한의 애곡에 가슴을 치는 무리들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극기생활에 귀신이 들렸다고 악평했습니다. 그 반면에 예수님은 생명과 천국과 소망을 주는 복음의 피리를 불었지만 이 피리 소리에 맞장구쳐 춤추는 무리들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모든 죄인들과 함께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보고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배척했습니다. 1. 영적으로 감각이 없는 세대 선지자가 나타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회개의 여사를 이룰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땅히 가슴을 치며 애곡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이 관용할 때 그 곳에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내어 그들에게 죄에서 돌이키라고 회개를 외치게 하십니다. 선지자 요나의 애곡하는 소리를 들은 니느웨 백성들은 이에 동조하여 가슴을 치며 애곡했습니다. 니느웨의 왕은 왕복을 벗고 대신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았습니다. 왕은 온 나라에 금식령을 선포하기를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각기 악하나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고 명을 내렸습니다(욘3:7-8).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경은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세례 요한의 애곡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으며 요한을 가리켜 귀신이 들린 사람이라고까지 혹평했습니다. 이 같은 일은 노아의 시대에도 그러했습니다. 노아가 120년간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며 회개하기를 바랐지만 그들의 생활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도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물 속에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노아가 애곡을 했지만 그들은 먹고 마시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2. 애곡을 해도 가슴을 안치는 세대 애곡이란 말은 장사 집에서 슬피 울부짖는 소리를 말합니다. 누구든 슬픈 일을 당한 장사 집에서 애곡이 나오게 되고 이 소리를 듣는 무리들은 주인의 슬픔에 동참하여 슬퍼하며 가슴을 칩니다. 이 비유는 죄에 대한 회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주님의 길을 평탄케 하려고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회개를 외치며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대제사장을 위시하여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이나 서기관들은 세례 요한의 회개의 소리를 듣고 슬퍼하며 애곡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기는 고사하고 그 마음이 더욱 완악해져 세례 요한을 죽였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애곡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1)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사55:7). 우리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받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죄악 중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죄악 중에서 살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죄악에서 떠나면 죄악이 우리를 패망케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라고 권면하십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국문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은 것은 낸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18:30-32). (3)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길은 회개뿐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4)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를 권면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을 내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렘5:25). 그러면 왜 사람들은 애곡하는 선지자의 경종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기에 인색한 것입니까? 그들의 마음이 죄로 굳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 심령의 완악함으로 회개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는 일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주님은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셨다”고 했습니다(막3:5). 심령이 완악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거역하며 성령의 일을 받으려 하지 않으며 구원의 역사를 대적합니다. 다음에 회개를 거역하는 원인은 사람들의 교만에 있습니다. 사람을 교만케 하는 것은 지식에 있습니다. 그의 명예와 권력에 있습니다. 그리고 남을 멸시하는 마음입니다. 이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그들의 대적이 되십니다. 3. 피리를 불어도 춤을 안추는 세대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 세대라고 하신 말씀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그 말 할 수 없는 축복을 거역하는 세대를 비유적으로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며 천국을 주며 평안을 줍니다. 이 복된 소리를 들을 때 사람들은 이 소리에 맞추어 기뻐해야 합니다. 사람이 피리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복음을 들어도 아무 감각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주님을 향하여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방했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의 나팔에 따라 춤을 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나오는 그리스도인들 조차 목회자의 피리에 좇아 춤을 추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 것입니까? 결론 : 그러면 왜 이런 세대에 이른 것입니까? 악한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세대료 부모를 거역하는 세대요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는 세대요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는 세대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세대인 것입니다. 지금 이 세대 사람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함을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 108 ≈ 권능을 보고도 믿지 않는 죄 (본문 : 마태복음 11 : 20 - 24) 서 론 : 주님은 많은 권능을 행하시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많은 수고를 기울이신 고을이 회개치 않고 주님을 배척했을 때 그 고을을 향하여 화를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고 주님의 구원의 사역을 보고도 회개치 아니하고 결실이 없을 때 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 등이 이런 고을들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주님은 두로와 시돈이나 소돔보다 심판 날에 하나님으로부터 화가 더욱 중하다는 것을 경종 하신 것입니다. 1. 세 고을의 역사적 배경 주님이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셨다는 고을, 고라신과 벳새다는 두로와 시돈과 비교되고 가버나움은 소돔과 비교되어 경종 하셨습니다. (1) 고라신은 요단강 서쪽 갈릴리 북편에 있는 성읍으로 이곳에서 주님은 많은 권능을 행하셨다고 했습니다. (2) 벳새다는 가버나움 근변에 있는 성읍으로 안드레와 빌립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은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곳으로 유명합니다. 주님이 산에서 기도하신 후 바다를 건너가신 곳이기도 합니다. 소경을 안찰 하시어 고치신 곳도 이곳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불 신앙을 꾸짖으시면서 그들에게 행하신 이런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다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 두로는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이 성은 주전331경에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이곳 주민들이 노예로 팔리고 시가지는 불타 버렸습니다. 그 후 로마가 점령하고 재건했지만 터키에 예속되어 다시 쇠잔해진 곳입니다. 시돈은 두로와 함께 동 지중해 연안에서 제일 큰 항구로 이곳 왕은 이세벨의 친정 아버지인 ‘엣바알’이었습니다. 주전351년에 바사에 반항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성읍 사람들이 스스로 도시를 불살라 버림으로 망하고 말았습니다. 역사상 이 두로와 시돈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나라들로 외국의 침략을 받아 멸망 받았으나 주님은 만약 이곳에서 고라신이나 벳새다에서 행했던 권능을 행하셨다면 그들이 회개했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4) 가버나움은 비교적 성경에 그 지명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 고을은 갈릴리 서북 해안에 있는 큰 성읍입니다. 이곳은 예수님의 제2고향으로 회당과 세관이 있고 주님은 이 지방에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 등을 부르셨습니다. 자기 종의 병을 고쳐 주시기 위해 주님을 찾아 나온 백부장이 살던 곳이며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 곳도 이곳입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친구들이 주님이 계신 곳으로 들여와 지붕을 뚫고 방 아래로 내리운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곳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끝까지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이들은 그 후에 회교도들에 의해 진멸을 당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2. 화가 있다고 선고받은 이유 주님께서 이처럼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을 향하여 화가 있다고 하신 이유는 다음 두 가지 원인으로 인해서입니다. (1) 권능을 보고도 믿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거나 바라보고도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화를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알아야 할 일은 하나님의 권능은 우리가 체험해야 할 일이요, 사모하고 바랄만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런 권능을 체험하고 능력을 맛보고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반드시 화를 당할 것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심은 그 같은 일을 통해서 우리로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권능만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고도 그 은혜를 소멸하여 죄를 범할 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6장에 나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신앙 생활의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6:4-6). (2) 그들은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받지 아니했습니다. 복음을 듣고도 마음이 완악하여 그것을 받지 않을 때는 그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복음을 듣지 않았을 때는 그 죄가 경합니다. 경하다는 말은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죄 사유함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주어질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말씀의 거역은 주님을 거역하는 죄가 따르는 것입니다. 말씀을 경히 여기거나 거역하는 자들에 대한 경종이 이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여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잠1:24-28). 3. 권능을 보고도 왜 회개치 않았나? 사람이 회개할 수 있는 일이 두 가지 경우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찔리는 경우입니다. 오순절에 회개한 유대인의 무리들은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회개했을 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고 두려움으로 회개하는 경우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경우를 다 경험했으면서도 회개치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이들은 회개치 못하는 것입니까? 사람의 마음이 강퍅하게 되면 말씀을 듣거나 권능을 보아도 그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민14:22-23).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 지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일에 지극히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는 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들을 때 순종하여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들은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 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치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히4:2).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순종하여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바라보거나 체험했을 때 우리는 더욱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교만과 강퍅한 마음을 버리고 온유와 겸손하므로 우리 주님의 뜻을 따라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 109 ≈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신 슬기 (본문 : 마태복음 11 : 25 - 27) 서 론 : 복음이 세상에 슬기 있고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에 대하여 주님은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고라신이나 벳새다, 가버나움이 주님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많은 권능을 바라보았지만 그들은 회개치 아니했습니다. 이같은 일은 스스로 슬기 있고 지혜롭다고 하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천국의 비밀을 감추시고 나타내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이 비밀은 세상에서 사람들이 사용하는 슬기나 지혜로는 깨달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비밀을 오직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복음을 듣거나 권능을 보아도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린아이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말입니까? 1. 세상 지혜로 알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 복음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세상 지혜나 슬기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십자가의 도가 헛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택한 모든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세상 지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새로운 지혜로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 지혜가 곧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적어도 생명을 얻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지혜 있는 자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의 총명을 폐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적용되는 것입니다(고전1:19). 만약 사람들이 세상 지혜로 십자가를 바라본다면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고전1:18). 그러면 왜 세상 지혜로나 슬기로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고전2:9).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셨다고 하신 것은 이 세상 지혜로 복음을 깨닫는 일에 미련케 하셨다는 뜻입니다. 2.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신 하나님 나라의 비밀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 지혜로 복음을 깨달을 수 없게 하시기 위해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비밀을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세상의 지혜나 슬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복음을 쉽게 믿고 쉽게 받아 드립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들이란 어린아이들처럼 인간의 지혜나 총명을 의지하지 않고 단순한 심령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 드리는 사람들을 가리킨 말입니다. (1) 어린아이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을 말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하셨습니다(마18:3-4). 어린아이들이 자신을 높일 줄을 모르는 것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겸손을 말합니다. 겸손한 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의 역대 왕 중에 가장 악한 왕이었지만 자신의 죄를 바라봄으로 하나님 앞에 겸비함을 보인 일이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에게 내리시기로 작정하신 재앙에 대하여 그 아들의 시대에야 내리시기로 하셨습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죄에 대하여 마음으로 통회합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하신 것은 교만한 자는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언제 겸손해 지는 것입니까? ①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될 때 겸손해집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죄를 바라볼 수 없었으므로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자신의 의로운 행위에 대하여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의 죄를 통절히 느꼈으므로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자신의 죄를 자복하면서 회개한 것입니다. ② 사람이 자신의 무익함을 느낄 때 겸손해 집니다. 탕자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최종적인 삶의 위기에 가서야 스스로 돌이켜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고 했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와 건강으로 인하여 교만한 사람들은 그 교만의 조건들을 제거해야 낮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③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바라보았을 때 겸비해집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그 어느 누구의 교만도 꺾여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성전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서 떨면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아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가슴을 쳤습니다(사6:5). (2) 어린아이들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막10:15). 받든다는 말은 공경하며 높인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이나 위에 있는 분들을 공경하며 높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온유하고 순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3. 아버지와 아들을 알 수 있는 계시 27절에서 주님은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들이란 독생하신 하나님,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같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란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을 가리키십니다. 죄인을 정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죄인을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로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만 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이름을 생명록에 기록하시고 그의 백성들을 피로 값주고 사신 그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계시는 누가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다”고 했습니다(고전2:10).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고전2:12). 결론 : 하나님은 이 같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세상에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의 맑고 깨끗하고 순박한 심령으로 돌아가 겸손을 배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우리의 마음이 교만하고 죄에 대하여 회개하는 마음이 없이 하나님께 나오면 고라신이나 벳새다 사람들처럼, 가버나움 사람들처럼, 화를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110 ≈ 예수님의 인생 초대장 (본문 : 마태복음 11 : 28 - 30) 서 론 : 성경에는 ‘오라’는 말씀이 600번나 나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예수님이 인생들을 향하여 내게로 오라고 하시는 인생 초대는 오직 한곳에만 나와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오늘 본문 말씀은 오직 한 사람만이 자신 있게 인생들에게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것은 그 분이 이 인생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이 주님의 초대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 갈 때 그는 말할 수 없는 위로와 위안과 축복을 받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쉼이라는 말씀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을 거역하고 그에게 오는 것을 거부할 때 그에게는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같은 사람의 인생은 멸망일 뿐입니다. 주님이 내게로 오라고 하신 말씀은 오늘날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말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복음을 통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방황하는 인생들을 향하여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오라고 하신 말씀은 인생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약속은 인생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권능이 그분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능력도 없으면서 오라고 한다면 이같은 일은 사람의 생명을 도적질하는 강도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런 생명의 사기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생명의 참 목자로 오신 분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10:10). 1. 누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들인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이란 누구를 가리킨 것입니까? 이 말씀은 온 인류를 안중에 두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모든 인생은 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인생 길을 쉼 없이 걸어갑니다. 주님은 이 같은 인생을 불쌍히 보시고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1) 수고하는 자란 고된 삶의 멍에를 메고 이 땅에서 고통을 저주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살아가는 인생을 가리킨 것입니다. 인생은 에덴에서 쫓겨난 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수고하고 라는 헬라어는 ‘코피온테스’(κοπιώντες)로 이 말의 뜻은 현재 계속 피곤하고 불안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의 이런 수고는 죄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죄를 범한 아담에게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창3:17). 아담의 후예들인 모든 남자들은 그 이마에 땀을 흘리는 수고가 없이는 인생을 살아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고의 결과도 헛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 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고 했습니다(전2:22-23). 또 여인들은 죄로 인하여 잉태하는 고통의 수고를 받았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창3:16). 이처럼 인생은 남녀를 물론하고 일생 동안 이같은 수고를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생들은 이런 수고로 그의 생애에 눈물이 따르고 질고가 따르며 시련과 고난과 환난이 따르고 그 결과 그의 인생이 만신창이가 된 채 그 마음에서 탄식과 슬픔이 그쳐질 사이가 없는 것입니다. (2) 무거운 짐이란 율법의 멍에와 죄의 멍에를 가리킨 말입니다. 무거운 짐진 자란 말은 ‘페풀티스메노이’(πεφορτισμἐνοι)로 이 말의 뜻은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계속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들이 지고 살아가는 율법이나 양심이나 죄는 지기에 곤비한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율법을 가리켜 지기 어려운 짐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 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눅11:46). 그러면 왜 율법이 인생에게 무거운 짐이 된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라고 선언하게 하시고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아멘’으로 화답하게 하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지키는 일에도 온전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약2:10). 죄 역시 인생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있습니다. 죄는 어느 국한된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음으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죄는 어떤 특정한 범죄만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육신으로 행하고 있는 모든 것이 곧 죄악인 것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롬8:13). 다윗은 자신의 죄를 생각하면서 이처럼 탄식했습니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고 기도했습니다(시38:4). 이 두 가지 인생의 짐은 아무라도 한평생 벗어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이 이 짐을 의식하게 될 때 그이 입에서 절망의 탄식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2. 다 내게로 오라 예수님은 이런 절망적인 인생들에게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같은 인생들에게 소망을 주시며 그들을 파멸에서 구원하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끄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이 자기에게 오는 일에 대하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6:37).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것은 그의 초청에 제한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입니다. 그 초청의 시간도 제한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입니다. 이 같은 부르심은 에덴에서 이미 들려 주셨습니다. 범죄한 아담을 향하여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마9:13).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처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벧전1:15). 예수님의 초청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에 대한 안식에 있습니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주님은 그 다음 말씀으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쉬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영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첫째로 우리 영혼의 만족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케 하심으로 우리에게 소망이 있게 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만족을 안겨 주십니다. 다음에 우리 마음의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사죄의 은혜에서 오는 평안으로 우리 마음속에 모든 불안과 걱정을 제거하고 오히려 즐거움과 안정을 줍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안식은 궁극적으로는 천국에서 완성되지만 현세적으로는 우리의 생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육신적인 모든 염려와 걱정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주님을 의뢰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받는 생활이기 때문에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을 향하여 내게로 오라고 부르십니다. ≈ 111 ≈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본문 : 마태복음 11 : 29 - 30) 서 론 :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곧 마음의 안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참 안식은 먼저 마음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안식은 그 곳에 천국이 이루어질 때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같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비결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우리들 마음에 간직하면 우리들의 마음이 쉼을 얻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1. 인류가 메어야 할 무거운 짐 예수님이 오시기 전, 인류는 두 가지 멍에를 메고 살아왔습니다. 하나는 죄의 멍에요 다른 하나는 율법의 멍에입니다. 그러던 것이 주님이 오심으로 한가지 멍에를 더 주셨습니다. 그것이 내 멍에라고 하신 새로운 예수의 멍에입니다. 인간들은 죄라고 하는 어쩔 수 없는 멍에를 메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에는 이같은 인간의 죄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하므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롬5:17-19).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간의 죄가 우리들이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으로 이 죄의 멍에를 메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멍에가 심히 무겁다는 것은 그 죄 값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망이라고 하셨습니다. (2) 율법은 인생들에게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율법을 받은 백성은 이스라엘이지만 이방인들은 양심이라고 하는 마음의 율법을 멍에로 지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것을 지키면 생명을 얻고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이 율벅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고 말씀했습니다(신27:26). 이처럼 율법은 지키지 못하는 자에게 저주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이 율법을 지키는 일로 하나님의 의나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이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한 것입니다(롬3:20). 원래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 인간으로 하나님 앞에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데 있기 때문에 율법으로 의를 얻거나 생명을 얻으려는 노력은 헛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율법이나 양심의 멍에 뿐 아니라 인간에게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살아가는데 있어 육신적으로 저야 하는 무거운 짐도 있습니다. 이 짐은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의 저주로 내려졌기 때문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1:12절에서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고 했습니다. 인간들은 이 모든 짐으로 인하여 피곤에 지쳐 있는 것입니다. 2. 내 멍에를 메라 이 같은 인생들을 향하여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져야 할 다른 또 하나의 멍에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멍에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내 멍에라고 하신 그리스도인들의 멍에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멍에란 어떤 것인가? 우리에게 메리고 권고하시는 내 멍에라고 하신 주님의 멍에란 무엇을 말씀하신 것인가?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온유와 겸손의 멍에입니다. 이 멍에를 우리가 메고 주님을 배우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배우고 메야 할 멍에는 온유입니다.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을 말합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마음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되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까지 하신 그런 마음입니다. (2) 다른 또 하나의 멍에는 겸손의 멍에입니다. 주님은 겸손하신 분입니다. 말씀이 육신으로까지 낮아지셨습니다. 부요하신 분으로 가난하시기까지 낮추셨습니다. 심판주이시면서 친히 인류의 죄 값으로 스스로 심판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습니다. 남을 대접하시고 남을 자기보다 높이시고 제자들의 발까지 씻기신 분입니다. 이 같은 주님의 마음을 우리 마음에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는 하루 아침에 배울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분명히 하나의 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짐을 내 멍에라고 하셨습니다. 이 멍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져야 할 멍에입니다. 그런데 이 멍에는 지기에 쉽고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무거운 율법과 죄의 멍에를 벗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대신 저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지라고 하신 멍에를 메야 합니다. 이 멍에는 성령의 힘으로 지기 때문에 쉬운 멍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멍에를 메는 일은 주님을 배우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으로 부터 배워야 합니다. 온유한 마음은 죄에 대한 회개에서 나옵니다. 죄는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듭니다. 죄는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과 불안을 심어줍니다. 회개한 마음속에 온유한 마음이 싹트는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은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온유한 마음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온유한 마음은 십자가를 지는 고난에서 자랍니다. 겸손은 언제나 자신의 부족을 아는 데서 나옵니다. 자기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작은 존재림을 여길 때 생깁니다. 겸손은 자기의 부족을 발견할 때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가르치심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우리가 늘 그의 가르침을 명심하여 그리스도를 배울 때 우리는 온유와 겸손의 그의 멍에를 메는 가운데서 우리의 마음의 참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면 구원의 확신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하늘의 상급을 소망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결론 : 주님은 우리가 저야 할 무거운 짐을 저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라고 하셨습니다. 이 멍에는 지기에 가벼울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쉼을 얻게 하고 영생을 얻습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멍에를 반드시 메야 합니다. 이것을 벗으려는 사람들은 율법과 좌의 멍에를 다시 멜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멍에를 메고 주님을 배우는 생활로 우리의 마음에 쉼을 얻고 소망으로 자기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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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11장 설교  밤중소리  2004-11-06
16:37:45
     Tutorial On Giants  gellChealener  2012-01-15
21:3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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