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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장 설교
 밤중소리  03-01 | VIEW : 4,410


  ≈ 78 ≈    한 문둥병자의 신앙


  (본문 : 마태복음 8 : 1 - 4)



   서 론 :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도덕율로써 산상보훈을 전하신 예수님은 그 위대한 설교를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 오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가르치심이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고 마치 권세 있는 자와 같았다고 한 것입니다. 그의 입의 말씀은 바로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산에서 내려오신 것은 이제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시면서 문둥이를 깨끗케 하시고 모든 병든 자를 고치시는 권능을 나타내셨습니다.


  1. 복음적 이적


  기독교는 이적의 종교입니다. 복음 그 자체가 이적입니다. 주님의 태어나심에서 보여주시는 바와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이적은 기독교만의 특징입니다. 그가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신 것도 이적입니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일 역시 이적 중에 이적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은 그의 복음 사역을 하시면서 수도 없이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사도들도 이적을 행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많은 이적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적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에 대하여 몇 가지로 분류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은 그의 생애 중에 수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예수님의 이적은 사도들이나 오늘날 우리에게 나타나는 이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은 그 스스로 가지고 계시는 권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이 우주 안의 모든 충만한 만물을 친히 창조하셨습니다. 그가 육신으로 땅에 계실 동안에도 그의 말씀은 창조적인 능력과 권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 지더라 제자들에게 이를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눅8:25).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주의 말씀의 권능은 이 우주 안에 존재하는 마물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히1:3절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했습니다. 육신으로 계실 동안에도 제한적이나마 이런 사역을 계속하셨습니다.

  (2) 다음에 사도적 이적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적 이적은 놀랍게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의 권능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권능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권능은 그들 스스로의 권능으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에게 그 권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사도적 권능의 특징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한즉 그대로 이루어졌고 모든 병이 사도들의 기도와 안수와 말씀으로 깨끗함을 얻을 수 있는 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도적 이적은 예외자가 없이 당장에 나타났다는 것과 즉석에서 그 권능이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이 같은 역사는 오직 사도 시대에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일은 복음을 효과 있고 권능 있게 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에 의해서 사도들에 의해서만 가능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3) 은사적 이적이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은 그의 몸을 이루는 교회를 세우시는 일에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 은사를 통해서 오늘날 교회에도 하나님의 이적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주시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고전12:10). 이 땅에 교회가 존속하는 한 성령의 은사가 존재합니다. 그 은사 중에는 병을 고치는 신유의 은사와 하나님의 권능과 이적을 나타내시는 능력의 은사도 있습니다. 이런 은사는 일반적으로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뜻에 따라 믿음의 분량대로 주십니다. 모든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시기 때문에 복음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은사적 이적은 사도시대와 같은 놀라운 권능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그 권능이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 특색입니다. 가령 병자를 위한 기도에도 계속적으로 기도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사는 주님의 경우나 사도들의 경우와는 달리 기도의 응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4) 다음에 일반적인 이적이 있습니다. 비록 성령의 특별한 은사는 받지 못했어도 일반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그 응답으로 받는 이적이 그런 경우입니다. 이런 이적의 역사도 우리 주변에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같은 것을 살펴볼 때 지금 교회에 사도시대와 똑같은 이적이 그대로 나타난다고 주장하거나 사도시대에 주셨던 은사가 그대로 나타난다고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2. 문둥 병자의 믿음


  주님이 산에서 내려오시자 주님 앞에 맨 먼저 나타나 주님의 은총을 받아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문둥병 자입니다. 왜 하필이면 문둥병 자가 제일 먼저 나타난 것입니까? 문둥병은 영원히 고침 받을 길이 없는 인간의 죄를 상징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영혼의 문둥병 자들입니다. 죄는 그 자체가 죽음이기 때문에 문둥병의 균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문둥병 자가 어떻게 고침 받은 것입니까?

  (1) 자기의 비참함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양심이나 율법을 주신 이유는 그것을 거울로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발견하여 생명 되시는 예수를 찾게 하시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영혼의 문둥병 자임을 알게 될 때 그 병을 고쳐주시는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될 것입니다.

  (2) 만난을 극복하고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문둥병 자는 예나 지금이나 철저하게 격리 수용되어 왔습니다. 이 문둥병 자가 주님 앞에 나오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는 ‘부정하다, 부정하다’는 비난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대중 속을 헤치고 주님 앞에 오기까지는 대중들의 돌팔매도 맞을 각오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신의 문둥병을 고치려는 일념으로 주님을 찾아 그 앞에 간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내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 그는 주님의 은총을 믿었습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나에게 어떤 과오가 있어도 나에게 어떤 죄악이 있어도 그의 자비와 긍휼을 힘입고 그 앞에 나가기만 하면 반드시 주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담대한 믿음은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승리를 안겨주는 것입니다.

  결론 : 이 문둥병 자는 주님께 나와 절을 했습니다. 온유와 겸손을 말합니다. 그는 주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믿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할 수 있나이다’고 말했습니다. 믿고 구하는 기도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이 따릅니다. 주님은 그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 79 ≈    백부장의 모범적인 믿음


  (본문 : 마태복음 8 : 5 - 13)



   서 론 :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주님의 칭찬을 들은 한 놀라운 믿음의 사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는 가버나움에 살고 있는 로마 군의 장교로서 한 백부장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사람으로부터 듣는 칭찬에는 함정이 있지만 주님으로부터 듣는 칭찬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우리가 남모르게 주님께 충성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은 주님의 칭찬을 받고자 함입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 했습니다(고후10:18). 이 같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칭찬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우리의 큰 위로와 상급이 될 것입니다.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고전4:5).


  1. 믿음으로 칭찬을 받은 백부장


  백부장이란 자기 밑에 100명의 군사를 거느린 로마 군의 장교를 가리킵니다. 이 백부장이 자기 집에 있는 한 종의 중풍병을 위해 주님께 나와 간구하는 과정에서 그의 위대한 믿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1) 이 백부장은 주님의 말씀의 권능을 믿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그가 창조주이신 사실을 모르고는 그의 말씀의 권능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도 이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는 바다물위를 걸어가면서도 의심하므로 물에 빠져들게 되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에게도 이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바람과 파도를 명하여 잔잔하게 하시는 주님의 권능을 보고는 그가 뉘기에 바람과 파도도 순종하는고 놀랬습니다. 그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무슨 말씀이든지 말씀만 하시면 그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주님의 말씀의 권능을 믿은 것입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고 말한 것입니다.

  (2) 이 백부장은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대로 성취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 같은 믿음을 가지게 된 이유에 대하여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저더러 가라 하면 오고 내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고 말했습니다. 자신도 명령에 의하여 움직이며 자기 부하들도 자신의 명령에 의하여 움직인다고 하는 사례를 들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세상에는 주님의 말씀을 거역할 그 어떤 피조물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의 말씀으로 만물이 창조되었고 지금도 그의 말씀으로 만물이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3) 이 백부장은 순종에서 오는 축복을 알았습니다.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나이다.” 백부장의 이 말은 말씀의 순종  에서 오는 축복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2. 백부장의 믿음의 열매


  주님의 이만한 칭찬을 받을 사람이라면 그에게는 반드시 열매가 따랐을 것입니다. 눅7장에 나오는 같은 사건의 기사에서 이 사람의 놀라운 열매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가버나움에 있는 장로들이 예수님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나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고 말했습니다.  

  (1) 이 백부장은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했습니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라고 한 이 말은 백부장의 아름다운 믿음의 생활을 엿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일4:20). 모세의 믿음이 이러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고 했습니다(히11:24-25).

  (2) 이 백부장은 회당을 건축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곳이면 안식일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 어디든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 회당에서 예배도 드리고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하셨습니다. 사도들도 유대인의 회당을 전도의 가장 적합한 전초기지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세운다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돈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버나움의 이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지만 그리고 군인의 신분으로 넉넉한 재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단독으로 회당을 지었다고 한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교회로 셋을 꼽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강변교회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기 교회는 그 높이가 무려 68메터로 120여년 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면 이 교회는 많은 교인들이나 어떤 재벌이 헌금하여 건축한 교회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교회를 지은 사람은 한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9세의 어린 소년시절부터 남의 집 하인노릇을 해가면서 성공한 성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한평생 수고하여 번 그 엄청난 돈을 모두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헌금으로 바쳐 강변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 이후 더욱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주님을 위해 좋은 사업을 많이 하였는데 오늘날 미국의 금융계를 주름잡고 있는 록펠러 씨가 바로 이 사람의 손자인 것입니다.

  (3) 이 백부장은 자기 집 종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의 신분에 차별을 두면 안됩니다. 비록 종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천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그 종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어 몹시 괴로워하나이다”고 했습니다. 눅7장에서는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종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 집의 종으로 도망쳐 나온 오네시모를 옥에서 만나 그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보낸 서신에서 오네시모를 가리켜 나와 네게 유익한 내 심복이라고 말하고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고 말했습니다(몬1:10-16).

  백부장이 주님께 간구한 내용을 보면 인간 백부장의 사랑의 아름다움이 그럼처럼 나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어 몹시 괴로워 하나이다.” 종의 괴로움을 이 백부장은 함께 짊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내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은사는 모든 성도들이 바라고 흠모할 만한 으뜸가는 은사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4) 이 같은 백부장의 아름다운 믿음은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일을 하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고 했습니다(눅7:4). 가버나움의 장로들이 예수님께 백부장의 아름다운 신앙과 그의 열매를 소개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열매는 이 백부장처럼 빛과 소금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인정받는 신앙은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 세례 요한은 주님의 신 들메를 끄르는 일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백부장은 주님이 내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는 주님을 모실 만한 가치가 없는 하찮은 존재란 뜻입니다. 그의 온유와 겸손을 말해 줍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마땅히 이 가버나움의 백부장을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 80 ≈    질병을 담당하신 예수님


  (본문 : 마태복음 8 : 14- 18)



   서 론 :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시면서 병자들을 말씀으로 고치셨습니다. 주님이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신 일에는 두 가지 특징이 따랐습니다. 하나는 말씀으로 고치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창조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 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어떤 병이라고 못 고치심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한 명의  예외자도 없이 다 고치셨습니다. “병든 자를 다 고치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떤 은사적인 능력이나 권능으로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로서의 권능으로 고치시기 때문에 예외자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1.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마태는 이 같은 예수님의 치료의 역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를 이루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고난을 예언하는 사53:4절에서 이같은 사실에 대하여 이처럼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마태는 이 예언의 말씀이 응해진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질고를 지셨다고 하신 말씀은 주님은 그가 지신 십자가의 고난에서 우리 인생들의 질병까지도 담당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생에게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오는 슬픔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쩔 수 없이 짊어지지 않을 수 없는 육신의 질병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인생의 질고와 고난에서 오는 슬픔을 지셨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는 질고를 연약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죄로 인하여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저주가 오고, 시험이 오고, 환난이 오고, 어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십자가에서 이 모든 것을 담당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고난은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하나 것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 가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니라”고 했습니다(히2:14,18).

  주님의 고난이 값진 것은 그가 겪으신 고난을 통하여 고난을 당하는 우리를 도우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세상을 이기신 분입니다. 주님은 세상을 이기신 그 능력으로 지금 우리로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환난을 당할 때 담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어떤 환난이라도 우리를 결정적으로 넘어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말은 세상 풍습을 이기고, 죄악을 이기고, 사망 권세를 이긴 우리의 영생을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능력으로 이처럼 세상을 이깁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능력은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오직 믿음으로 이긴다고 하시고 이 믿음이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일5:4,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일은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따른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믿음만 견고히 잡으면 세상을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2. 질병을 담당하신 예수님


  주님의 십자가에는 우리의 질병까지도 함께 못 박혀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질고를 지고 고난을 당하셨다고 하는 말씀에 역역히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이같은 일은 사53:5절에서 자세히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들입니다. 이 같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은 그가 찔림과 상하심으로 고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나음을 입었다는 말씀에는 인생이 겪는 질고와 슬픔의 치료도 들어가 있습니다. 인간의 질병 역시 죄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죄의 저주에서 풀릴 때 이 질병에서도 풀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질병에서 나음을 입었다는 말씀은 모든 질병의 육신적인 치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질병의 근원적인 치료를 말하는 것입니다.

  질병은 인생에게 죽음의 두려움을 줍니다. 주님은 이 죽음의 두려움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것입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어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2:15). 질병은 인간에게 절망을 주고 삶의 의욕을 빼앗아 갑니다. 38년된 중풍병자는 그의 한 평생을 질병으로 폐인고 같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또하나 질병은 사람들이 애써 모아논 재물을 순식간에 날려보냅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온 한 여인의 경우, 많은 의원에게 괴로움만 당하고 있는 재산을 다 허비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생과 소망은 이런 모든 것들을 능히 이길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주님은 우리가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일에 자비를 베푸시어 그 질병을 고쳐 주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질병에는 다섯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요5:14). ① 죄 값으로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주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하여 사유하심을 받으면 주님이 그 병을 고쳐 주십니다. ② 때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주시는 질병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9:3).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나타내실 때 치료해 주십니다. ③ 찌르는 가시로 주시는 질병도 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고후12:7). 겸손히 주님의 뜻을 기다리고 바울처럼 오히려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④ 마귀의 역사로 오는 질병도 있습니다. 욥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고 했습니다(욥2:7). 잘 인내하면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⑤ 죽을병으로 오는 질병이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그때 히스기아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저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고 했습니다.(왕하20:1). 그러나 이 모든 질병이 주님의 권능 앞에서는 즉시 물러가는 것입니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했습니다. (마4:33).

  결론 :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역사로 이 질병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이 친히 우리의 질병을 담당하셨으니 그의 말씀이나 권능으로 고쳐 주시는 경우입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로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심어 주신 소망과 영생은 우리의 육신적인 모든 질병을 이길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했습니다(롬8:37). 우리는 우리의 전 생애를 주님만 의뢰함으로 이 같은 주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 81 ≈    한 서기관의 실패


  (본문 : 마태복음 8 : 18- 20)



   서 론 : 한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가운데서 나아 와 그가 주님을 따를 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좇으리이다.” 우리가 언뜻 듣기에 서기관의 이 말은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진실한 신앙고백으로 들려 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실망스런 말씀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지금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큰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1. 서기관의 결단이 거절된 이유


  아마도 이곳에 등장하는 서기관은 다른 서기관들과는 달리 예수님께 대하여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주님이 이스라엘이 바라는 메시야이심을 깨달은 사람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그의 결심에서 이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의 이 같은 결단에 대하여 처음부터 탐탁히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나타난 상황에 의해서 사리를 판단하려고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 동기와 마음의 진실함을 보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좇겠다고 한 서기관의 경우, 그의 결단의 동기가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했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감상적이나 감동적인 일시적 기분에 의해서 결정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리스도와 연합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관계는 그 어떤 경우에도 끊어질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온전한 관계를 계속적으로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의 경우는 자기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에 의해 내려진 결단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결단은 대개의 경우 바른 동기에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에 동기가 올바르지 못하면 언제나 배신이 빠르게 따릅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은 것을 훔쳐 감이러라 ”고 하는 말씀에서 유다는 원래부터 도벽이 있는 도적이었으며 그의 동기 자체가 악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 그는 육신의 생각으로 주님을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육신의 생각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그 동기가 하나님의 영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에 있으므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롬8:7-8).

  (2) 서기관의 결단 속에는 시련이나 고난의 각오가 들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에는 영원한 기쁨과 소망과 값진 보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같은 사실을 믿고 그것을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고난과 시련이 따르며 우리는 이를 각오하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빌1:29). 우리가 고난을 능히 각오하고 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고난을 통해 장차 우리에게 오는 영광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했습니다(롬8:17-18).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생애에 반드시 하나님의 시련이 따르며 이 시련은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하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약1:2-3). 믿음의 시련이 없다면 하나님이 우리로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인내를 이룰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이같은 그리스도인의 시련은 주님이 오시는 날, 놀라운 상급이 따른다고 하셨습니다(벧전4:12-13).


  2. 주님의 대답에서 보여주신 교훈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하신 대답은 동문서답처럼 들려지지만 이 말씀이 교훈해 주시는 뜻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부요하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고후8:9). 우리 주님은 그의 태어나심부터 가난하셨습니다. 그의 생애는 가난에서 시작되어 가난으로 마치셨습니다. 그는 목수의 가정에 태어나셔서 교육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그의 공생애 중이나 전도 여행 시에도 산에서 밤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원래가 가난해 지실 수 없는 분입니다.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의 이런 가난은 죄로 인하여 저주받아 참으로 가난하게 된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로부터 생명의 부요함을 받았습니다. 삶의 부요함을 받았습니다. 천국의 부요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보다도 생명이요 부활이신 그 분 자신을 내가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보다 부요함이 세상에 어디 있을 것입니까? 우리가 가지게 된 모든 부요는 주님이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가 갖게 된 영적 부요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 영적 부요함을 받았으며 이런 부요는 지금 우리가 믿음으로 소유하고 있지만 주님이 오시는 날, 우리가 주님 앞에 가는 날, 그 부요의 소유자로서 영원한 생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 다른 한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가 거하실 처소를 찾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거하실 처소는 우리의 심령인데 우리는 그 분에게 아늑하고 따스한 그의 처소를 제공해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을 우리의 마음에서 밖으로 내쫓으므로  내 마음 밖에서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노라고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려 이르시기를 문을 열어달라고 노크하시지만 우리는 좀처럼 열어 주려고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생각 때문에 주님을 따르고 있다면 이 시간에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 82 ≈    너는 나를 좇으라


  (본문 : 마태복음 8 : 21- 22)



   서 론 :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해 온 그리스도인 중 어떤 일을 계기로 세상으로 다시 발길을 돌이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일을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좇겠다고 고백한 그 서기관의 동기는 육신의 영광에 두고 있었으므로 주님으로부터 사람이 주를 따르는 일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각오가 없이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심으로 그의 안일한 생각을 물리치셨습니다. 그가 그 후에 어떤 길을 걷게 되었는지 기록된 바가 없으므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직후, 이번엔 주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주여 나로 먼저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하는 간청을 드렸습니다. 이 사람은 서기관과는 달리 이미 주님을 따르고 있는 제자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몸은 주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집에 계시는 부친의 생각으로 차 있었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생각하는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같은 생각으로 인하여 주님의 일이 중단되거나 주님을 따르는 일에서 떨어져 나간다거나 진리를 저버리는 일이 따라서는 안 됩니다.


  1. 왜 세상을 바라보게 되나?


  주님이 비유하신 씨 뿌리는 말씀 중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도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기쁨으로 받지만 말씀으로 인한 시련이 올 때에는 주님을 저버리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인하여 결실치 못하는 경우도 말씀하셨습니다. 부친의 장사로 먼저 집에 돌아가겠다고 한 이 제자의 경우는 세상의 염려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세상으로 가까이 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모든 염려를 주게 맡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열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하므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했습니다. (벧전5:7 ; 빌4:6). 우리가 우리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염려를 친히 돌보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르려면 분명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심으로 약속하신 그의 말씀을 신뢰하는데서 확고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소망이 없을 때 그의 믿음은 흔들리게 되고 육신적인 어떤 이유가 계기가 되어 믿음을 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귀중함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주님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저버릴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생명적 연합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밭에 감추인 보화입니다. 이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자기의 소유로 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지 못한 사람은 아직도 보화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1) 주님을 따른다는 말은 한 주인만을 섬기는 일입니다. 주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재물로 말미암아 주님을 등지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부자 청년의 겨우만 해도 그가 생명의 길을 찾으려고 주님을 찾아 나왔지만 재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거의 다 들어간 생명의 문에서 세상으로 등을 돌린 것입니다.

  (2) 주님을 따르는 길은 육신의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육신으로 주님을 섬기는 자는 그 육신으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둘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그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

  (3) 그리스도인은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생각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했습니다(롬8:5-6).

  (4) 주님을 사랑하는 생활은 주님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갈2:20). 주님의 제자라고 말하는 이 사람은 주님을 따라야 할 이런 조건들이 구비되어 있지를 못했습니다.


  2.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부친의 장사 지낼 것을 구실로 내건 이 제자의 경우를 보면 그의 말에도 성경적인 상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십계명 중,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계명은 제 5계명으로 이 계명을 가리켜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런 그의 간구를 거절하신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제자는 부친의 장사지낼 일을 주님을 떠나는 하나의 구실로 삼고 있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경우는 그의 그같은 간구가 그의 진심에서 나왔을지라도 그가 부친의 장사를 위해 잠시 동안이나마 주님을 떠나는 일은 결구 모든 것을 상실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죽은 자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결코 그리스도인들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에 등한히 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부친에 대한 일을 집안에 있는 다른 식구들에게 맡겨도 된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가 주님을 따르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면 자기가 집에 가서 부친을 위해 애쓰는 일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마귀는 언제나 그리스도인들 앞에 그럴듯한 구실을 제공합니다. 이 구실은 물론 마귀의 올무인데 사람이 이 올무에 걸리면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을 떠나는 일은 한평생에 단 한번이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곧 자기자신의 생명을 잃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마22:37-40).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가정의 어려움이 있다 해도 그런 일이 주님을 떠나는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에서 보여주시는 대로 우리의 이웃은 언제나 하나님을 앞지를 수 없습니다.

  결론 : 베드로는 주님을 따를 때 배와 부친을 버리고 따랐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일꾼들에게 들려주신 황금율이 있습니다. “쟁기를 메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쟁기란 복음을 말합니다. 계속적으로 복음의 씨를 뿌리고 밭을 갈아야 합니다. 뒤란 세상을 말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뒤에 있지 않고 앞에 있습니다. 뒤를 돌아보는 자는 샘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에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을 따르는 일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 83 ≈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 예수님


  (본문 : 마태복음 8 : 23- 27)



   서 론 : 주님은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 쉴 사이도 없이 이곳 저곳을 부지런히 다니셨습니다. 하루는 주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 갈릴리 호수를 건너 가다랴 지방으로 가실 때의 일입니다. 이 갈릴리 호수는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구약에는 기네레 바다 또는 게네사렛 바다라고 불렸으며 신약 시대에는 갈릴리 바다, 디베랴 바다 등으로 불려졌습니다. 이 갈릴리 호수는 담수호로 길이가 남북으로 20키로, 동서로는 제일 넓은 곳이 12키로 미터 가량입니다. 수면은 바다 표면보다 무려 207미터나 낮고 호수의 깊이는 60미터 이상 되는 곳이 별로 없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북편부터 사해 남편에 이르기까지 해면보다 대단히 깊은 분지와 저지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면에서 기압 관계가 빨리 변하고 바람과 회오리바람이 잦아서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종종 일어나곤 했습니다. 주님은 배에 오르자마자 몸이 몹시 피곤하여 곧 잠이 드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이 갈릴리 호수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된 것입니다.


  1. 바다와 배와 그리스도


  여기서 바다를 우리가 건너가야 할 인생 항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는 반드시 바다를 건너가야 할 인생들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옛날부터 능히 그 수효조차 셀 수 없는 많은 배들이 세상이라고 하는 이 큰 바다를 항해하고 있지만 그들은 그들이 원하지 않는 잘못된 목표지에 당도하고 있는데 이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들이 당도한 곳은 멸망이요 지옥입니다. 둘째 사망이라고 하는 영원한 불 못입니다. 그러나 그 배속에 그리스도께서 타셨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배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은 그 배의 운전자가 그리스도이심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타신 배의 목적지는 분명합니다. 그 분은 지금 천국에 계시며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소망의 항구인 주님이 계신 그 나라에 당도하게 될 것입니다.

  (1) 그리스도께서 먼저 배에 오르셨습니다. 주님이 배에 오르신 일은 우리 속에 내주 하시는 주님을 상징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롬8:9). 이 배는 주님을 태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면 그 마음 문이 열려져서 주님이 들어오십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이 이 마음 문을 열어 주님이 그들의 인생의 배에 동승하심으로 우리와 함께 우리의 인생 길을 항해하실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계3:20). 주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주님이 그의 인생을 인도하시고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2) 배 안에 주님이 계시다고 배의 운항이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의 배에는 주님이 타셨지만 큰 놀을 만나 풍랑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그들의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제 자기 인생은 안전과 순탄과 평안이 있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인생의 큰 놀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몹시 당황하게 되고 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때로는 고난과 시련과 어려움과 실패가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의인에게도 고난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34:19). 의인도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잠24:16).  의인도 하나님의 시험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요셉이 그러했으며 욥도 그런 시험을 받았습니다. 이같은 일에 대하여 베드로는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2-13).

  (3) 그러나 배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한,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 일에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 내 속에 나와 함께 계심으로 우리는 환난이나 역경 중에라도 능히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 이유는 그가 나의 인생을 나와 함께 살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한다”고 말했습니다(빌1:6).


  2.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그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부로서의 노련한 기술과 힘으로 파도를 피하여 배를 앞으로 전진시키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배를 안전하게 버텨 나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 때 그들은 배에서 곤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의 처음 생각에는 이런 풍랑쯤이야 자기들의 힘으로도 능히 헤쳐나갈 수 있다고 자신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이같은 자신을 언제나 자기 인생의 낭패와 실패를 불러옵니다.

  사람들은 미련한 연고로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야 주님 앞에 도움을 청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주님은 그들의 간구를 못들은 척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책망하시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바다가 잔잔해 진 것입니다.

  (1)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었던 증거로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을 곁에 두고서도 그를 의뢰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의뢰치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믿음이 없거나 작은 연고 때문입니다. 다른 한가지는 주님이 행하신 이적을 보고 그들이 기이히 여겼다는데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능력을 기이히 여기는 사람은 믿음이 적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가지는 “이 어떤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고 말한 것에서 예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는 그들의 어린 신앙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선생님이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그런 믿음을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2) 믿음이 작은 자에게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일이 있습니다. 두려움입니다. 그들은 풍랑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무서워한다는 말은 ‘데이리아오’로 이 말의 뜻은 비겁하게 군다, 주저한다는 의미로 쓰여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약속에 대한 불신에서 오는 불안과 두려움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믿음이 적은 자들의 어리석은 행동은 자기 스스로 그 풍랑을 잔잔하게 하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결론 : 그들은 자신들이 절망적인 상태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주무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를 깨우게 되었습니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 주님을 찾았으면 그를 향하여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나와 함께 임재하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환난 중에도 그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구하는 생활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적인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84 ≈    귀신의 존재와 활동


  (본문 : 마태복음 8 : 28- 34)



   서 론 : 신약 성경에는 귀신, 악령, 사탄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사람을 미혹하고 질병으로 고통을 주며 사람으로 미치게도 하고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영적 존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가다라 지방에 가셨을 때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서 예수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귀신 들린 자가 주님을 향하여 외치기를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만일 우리를 쫓아내 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보내소서”라고 했습니다. 물론 귀신들린 이들의 입에서 나온 이 같은 간구는 사람의 입을 빌려 외친 귀신의 소리였습니다.


  1. 귀신의 존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귀신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 귀신은 실재로 존재하는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귀신은 영적 존재로 실존합니다. 귀신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괴롭히고 대적하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일 등을 하는 인격적 존재인 것입니다.

  (2) 귀신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임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귀신들이 예수님을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두려워했습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떤다고 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3) 귀신들은 자기들이 언제인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줄로 알고 있습니다.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여기서 때란 귀신이 심판 받을 최후의 시기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같은 때가 이르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귀신은 예수님께 때가 이르기도 전에 어찌하여 자기들 앞에 나타나서 괴롭히냐는 것입니다.


  2. 귀신은 누구인가?


  귀신을 죽은 자들의 영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근거로 귀먹은 귀신, 소경 된 귀신, 벙어리 귀신 등의 이름으로 보아 귀머거리로 죽은 사람의 영혼, 소경으로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귀신이 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이 죽은 사람의 망령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원래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헬라 철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헤시오드’의 글에서 발견된 것을 보면 귀신을 황금 나이에 죽은 사람의 영혼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명한 피타코라스 학파에서는 정령술을 주장하는데 그들은 공기에까지 영이 존재하며 그 영은 영웅들의 망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플라토는 그 당시 사람들의 사상과 동일하게 귀신을 망령이라고 했습니다.

  (2) 귀신에 대하여 사탄과 함께 타락한 하늘의 악한 영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사람의 영이 죽은 후에 세상에 떠돌아다닌다고 나타나 있는 곳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새로운 장소로 옮겨진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3:21)고 했습니다. 인생의 혼이 위로 올라간다는 말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히9:27). 사람이 죽는 것이 심판인 것이 아니라 그 후에 받을 영혼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색 옷 입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사람이 죽은 후 그 영혼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하여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눅16:22-23).

  계16:14절 말씀을 보면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귀신의 영에 대하여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이 영은 이적의 권능을 행할 수 있는 영이기도 합니다. 이런 말씀은 귀신이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아니란 사실을 나타내 주고 있는 말입니다.

  딤전4:1절 말씀을 보면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란 말씀에서 볼 때 사람의 죽은 영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미혹 할만 한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귀신을 ‘다이모니온’(δαιμὀνιον)이라 하며 마귀를 ‘디아볼로스’(διἀβολος)라고 합니다. 그런데 귀신의 왕이라고 부를 때 마귀를 지칭하는 ‘디아볼로스’란 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귀신은 곧 사탄의 사자들로 사람의 죽은 영혼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마25:41).


  3. 귀신들의 간구


  귀신들은 주님께 “만일 우리를 쫓아내 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보내소서”란 간구에 예수님은 저희더러 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많은 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 다른 사람들이 자기 재산으로 소유하고 있는 돼지 떼를 죽게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주님의 깊은 뜻이 계신 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만 이 일의 결과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한 사람의 생명은 돼지 수천 마리보다 더 귀하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귀신을 멸하러 오신 분은 아닙니다. 귀신을 멸할 시기는 따로 있습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는 심판을 내리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마25:41). 다만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여기서 문제시되는 것은 주님은 과연 귀신들의 간구를 들어 응답해 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응답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여기셨기 때문에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일로 시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신 예수님을 만나려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런 주님의 권능을 바라보면서도 그리스도를 영접도 아니했고 오히려 주님께 그곳에서 물러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를 만나려고 주님 앞에 나왔다고 다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대단한 흥미를 가졌지만 또 한편으로는 엄청난 물질의 손실을 당한 일에 두려워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재산상의 피해를 받아가면서까지 생명의 길을 걷기를 원치 않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 : 세상 종말에는 귀신의 영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는 일, 미혹을 받는 일, 잘못된 가르침으로 유혹하는 일 등, 이 모든 역사로 성도들을 미혹할 것입니다. 우리는 귀신의 존재를 가볍게 보거나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들보다 훨씬 월등하고 우월한 주님의 능력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 귀신을 진리로 대적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 85 ≈    마귀의 정체와 그를 이기는 길


  (본문 : 마태복음 8 : 28- 34)



   서 론 : 우리는 마귀가 실존하는 인격체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자들로 악령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러면 마귀나 이 악령들의 존재는 어디서 나온 것이냐? 이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마귀의 존재와 그의 활동에 대해서만 말씀하시고 그의 기원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으신 이유는 우리의 구원 역사에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이 마귀의 존재나 그의 기원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는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을 이기려면 무엇보다 더 그 대적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 마귀의 기원


  모든 존재는 그 기원이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만이 알파와 오메가의 존재로 영원히 계실 뿐 피조물들에게는 존재의 근원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귀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음 세 가지 설이 있습니다.
  (1) 뱀이 마귀에 되었다는 설입니다. 이 설은 창3:1절에 근거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더냐.” 이런 하와와의 대화에서 하와를 유혹한 사탄이 뱀으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사탄이 뱀으로 단정할 수 있는 근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탄은 들짐승 중에 간교한 뱀에게 들어가 하와와 대화하게 된 것입니다. 그 같은 증거는 많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짐승들에게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언어를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사람이나 짐승 속에 들어갈 수 있으며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있고 사람과 대화할 수도 있습니다.

  (2) 다른 한가지는 마귀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란 설입니다. 그러나 이 설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위배되는 주장으로 합당치 못합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악의 극치인 사탄을 친히 창조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마지막 세 번째 설은 천사의 타락 설입니다. 천사가 타락하여 마귀의 자리에 떨어졌다고 하는 주장입니다. 마치 인간이 범죄 하므로 타락하여 죄인이 되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가 된 것처럼 그 지위가 높은 천사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마귀의 자리로 타락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이 마귀 타락 설이 성경과 가장 부합한 정통적인 학설로 오늘날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2. 루시퍼의 타락


  많은 신학자들이 사탄의 이름을 사용할 때 그 근원적인 이름으로 두 가지를 사용합니다. 하나는 ‘루시퍼’란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사14:12절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이 말씀에서 계명성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계명성이란 말이 바로 ‘루시퍼’로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이 별은 보통 샛별이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귀가 처음 지음을 받았을 당시 그의 완전함과 그 지위의 아름다움과 높음을 나타내 주는 표현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를 가르켜 ‘그룹’이라고도 말합니다. 아마 이 말은 마귀의 이름 중 그의 전신(前身)을 나타내는 가장 적절한 이름이 될 것입니다. 겔28:14절에서 그룹이란 이름이 마귀의 타락상을 보여 주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강석 사이에 왕래하였도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스겔서에는 마귀가 타락하기 이전, 그의 창조될 당시의 그의 아름다운 지위와 그의 높은 영적 위치를 말해주며, 이사야서에서는 그의 타락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룹의 존재에 대하여 에스겔 1장에 보면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행동하는 생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생물이 하늘에서 얼마나 높은 지위에 있는가에 대하여 계시록에서 말씀해 주는 네 생물의 경우에서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마귀와 그의 사자들


  마귀는 그의 이름이 여러 가지로 나옵니다. 마귀, 사탄, 옛 뱀, 붉은 용, 바알세불, 이 세상 임금,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참소자 등 많은 이름이 그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마귀와 함께 등장하고 행동하는 악한 영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 존재에 대하여 “마귀와 그 사자들”이라고 말씀하셨고 계12:7절에서는 “용과 그의 사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사탄의 나라가 존재하고 있음을 시사하셨습니다(마12:26). 사탄의 나라는 사탄이 왕이요 그 휘하에 있는 악한 영의 무리들이 존재합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란 말씀이 있습니다(유1:6). 그 가둔 장소가 무저갱으로 나오고 있습니다(계9:2, 눅8:31). 그러므로 악한 영들은 그의 처소가 두 곳으로 나오고 있는데 한 곳은 세상 공중이고 한 곳은 무저갱입니다. 이 무저갱에 갇혀 있는 악령들로 마지막 때에 세상에 나와서 그 이마에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을 해치는 첫째 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마귀는 하나님 앞에 범죄하므로 그의 거룩한 본래의 품성이 전적으로 더러워졌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을 미혹하여 타락시키는 일에 성공하므로써 죄의 주관자,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타락하므로 그의 지혜는 간교하게 되었고 그의 능력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권세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존재는 사람이건 영적 피조물이건 다 그 품성이 더러워지며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대적자로 변신하기 때문에 악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사람의 마음속에 심겨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아갑니다(마13:19). 이들은 하나님의 교회에 가라지를 덧뿌립니다(마13:39). 이들은 까닭 없이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킵니다(대상121:1). 이들은 사람들에게 병을 주며 그 병으로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눅13:16), 이들은 사람의 마음속에 악한 사상을 집어 넣기도 합니다(요13:2). 이들은 자신을 광명한 천사로 속이며 유혹합니다(살전2:18). 이들은 사람을 시험합니다(살전3:5).

  성경에는 이들이 당할 운명에 대하여 세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① 인류의 종말에 미가엘 천사에 의하여 공중에서 내어쫓깁니다(계12:7-9). 이때 그들의 최종적인 운명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② 다음에 마귀는 1천년간 결박을 당한 채 무저갱 속에 갇히게 됩니다(계20:1-3). ③ 그리고 이들은 최후적으로 영원한 불 못 속에 던져지게 됩니다(계20:10). 이것이 마귀의 종말입니다.

  결론 :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그 삼킬 자를 찾아다닌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마귀를 이기신 우리 주님과 연합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귀를 이기는 생활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마귀의 권세를 이기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옷입니다. 굳센 믿음과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면 우리는 언제나 마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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