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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의 결국 (27 : 1 - 10)
 민병석  11-14 | VIEW : 4,219

  ≈ 199 ≈       가룟 유다의 결국


  (본문 : 마태복음 27 : 1 - 10)


  서 론 : 여기에 유다의 회개가 나옵니다. 회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양심적인 회개요, 하나는 복음적인 회개입니다. 양심적인 회개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회개로 이 회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양심적인 회개의 표본 인물은 가룟 유다요 그는 결국 그 회개의 결과 목을 매어 스스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적 회개의 표본 인물은 베드로인데 그는 더욱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 나갔습니다.


  1. 유다가 뉘우친 과정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쳤다”고 했습니다(3). 여기서 뉘우친다는 ‘메타멜로마이’란 말은 후회한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한 일을 돌이켜 보고 양심의 고통을 받아 번민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후회하는 사람들의 열매를 보면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그런 사람은 마음에 괴로움을 받는 생애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이 그의 평생에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유하심을 받지 못하는 죄는 우리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고 양심에 고통을 주게 됩니다.

  (2) 유다는 스승을 팔아 받은 돈을 도로 갖다 주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회개하는 표로 자기가 얻은 부당 이익이나 남에게 손실을 준 물질적인 손실에 대하여 변상해 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적인 변제가 될 뿐 이것으로 하나님의 사죄를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유다는 결국 그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돈올 반납했지만 그들은 그 죄에 대한 책임은 네게 있으니 네가 당하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범 한 죄는 자기가 담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맛 잃은 소금이 되면 세상 사람들에게조차 짓밟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마5:13).

  (4) 유다는 죽는 길을 택했습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말은 죄 값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유다는 자신이 한 일이 이토록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자기의 배신이 주님이 죽기에까지 이르게 되자 유다는 비로소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죄를 범하기까지는 분별력이 약해지고 담대해집니다. 이것은 죄의 강한 유혹에 비해 인간의 의지가 너무나도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이미 죄의 종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롬6:12).

  유다는 스승을 판 돈 은 삼십을 성소에 던지고 목메어 죽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팔아 번 돈은 자기 소유가 되지 못합니다. 성수주일하지 않고, 십일조 없이 번 돈은 자기 소유로 쓰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돈은 마치 구멍 뚫린 전대에 넣음과 같고 “너희는 쌓으라 나는 헐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말 1:4).


  2. 유다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유다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자기 죄도 고백했습니다. 그 죄로 인하여 고민도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결국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유다는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1) 유대의 회개는 양심의 회개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따른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회개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밖에 나아가 통곡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회개는 하나님을 향한 회개를 말합니다. 유다처럼 대제사장에게 자기 죄를 자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의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일1:9).

  (2) 유다는 양심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양심의 인도를 받는 회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아마 그 사람의 도덕적인 행실은 바로 잡을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어느 정도 자기 마음의 위로가 될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열매를 맺지는 못합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는데 있습니다. 이 같은 회개는 양심의 인도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죄의 사유는 하나님의 아들을 힘입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3) 유다는 자살로 그의 인생을 마쳤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개과천선함으로 원상복귀를 하든가? 아니면 양심의 소리에 괴로워 자살을 시도함으로 인생으로서의 최고의 책임을 수행하던가? 두 가지 중에 한 가지입니다. 가룟 유다는 후자를 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회개는 탕자의 경우처럼 그의 발걸음을 아버지께로 돌이키는 일입니다(눅15:17-20).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로 돌이킬 줄 모르는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아닙니다.


  3. 토기장이의 밭을 산 피 값


  유다가 스승을 판 은 삼십을 피 값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대제사장들의 업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고 말한 것입니다. 유다가 그들에게 찾아와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는 후회의 말과 함께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그러나 돈을 성전고에 넣어 두기에 합당치 않은 것은 피 값으로 지불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국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습니다. 이런 일은 이미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의 성취라고 마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인용한 예레미야의 예언은 사실상 예레미야의 글에 있는 내용과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차라리 스가랴의 글에 있는 말씀과 많은 유사점올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풀이해야 하는 것인가? 마태가 인용한 예레미아의 글은 사실상 스가랴의 예언과 같은 뜻으로 스가랴가 예언한 글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말한 힌놈의 골짜기는 저주의 골짜기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그 곳을 더럽혔는데 그것은 그 곳이 다른 신들에게 분향한 곳이 되었기 때문입니다(렘19:1-4).

  여기서 예레미야가 말한 이 곳이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이 자리가 곧 유다가 던진 피 값으로 산 토기장이의 밭인 것입니다. 4철에서 무죄한 자의 피로 이 곳에 채웠다고 하신 말씀은 무죄하신 자를 팔아 얻은 은으로 이 곳에 채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가 채워진 것처럼 그 아들의 피를 흘린 이스라엘도 이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경종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같은 경종이 스가랴의 글에 와서 더욱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 놓고 있는 것입니다(슥11:12-13). 그러므로 마태가 스가랴의 글에 있는 예언을 예레미야로 말씀하셨다고 표현한 것은 스가랴가 예레미야의 글에서 예언의 근거를 삼은 것이기 때문이며 마태는 이 예언의 글을 가룟 유다와 연결시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낸 것입니다.

  결 론 :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회개에 있어서 마치 유다와 같은 회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심적인 회개, 양심의 소리를 듣고 움직이는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회개에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열매가 따르지 못합니다. 말씀을 따라 성령으로 이루는 회개만이 그리스도인의 참 회개임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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