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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종말론과 첫째 부활 - (1)
 민병석  11-06 | VIEW : 3,800


제 1 장 종말론과 첫째 부활


종말론과 첫째 부활은 긴밀히 연결된 말이다. 첫째 부활을 빼고는 종말론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째 부활에 관한 제반 해석이 우리에게 명쾌한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사실인즉 이 첫째 부활 문제의 바른 해석이야말로 종말론의 바른 해석의 길잡이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이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1. 종말을 맞은 하나님의 종들과 요한 계시록과의 관계


⑴ 다양한 종말론

보편적으로 우리가 종말론이라 하면 인류의 종말에 관한 성경적인 관찰을 신학적으로 체계화시킨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성경을 관찰하는 각자의 신학적인 입장이나 해석의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성경 안에 있는 종말적 사건들이 지만 모든 사건의 해석상 일치를 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후 천년설도 나왔고 전 천년설도 나왔으며 혹은 세대주의적 해석이니 상징적 해석이니 등 실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종류의 학설이 나오게 되었다.

그 중에 우리가 취해야 할 종말론적 학설은 어떤 것이며, 또 어떤 방향으로 종말론을 정립해야 할 것인가? 그 정확한 방향을 결정하기란 생각보다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 목회자의 고민이 있다. 이제 세상은 바야흐로 인류의 종말을 향하여 숨가쁘게 달음질치고 있다. 역사가 앞으로 나가고 있는 이상 그 역사는 인류의 종말을 향하여 치닫고 있다는 사실을 그 누가 부인할 것인가? 특히 근래에 와서 교계 안에서는 각가지 종말론에 대한 학설이 분분하고 더군다나 년, 월, 일, 시까지 거론되는 시한부 종말론은 교계 뿐 아니라 사회 각층에까지 크나큰 충격을 주고 있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도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국제 정세의 흐름은 급변하는 변이(變移) 가운데서 무엇인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우리들에게 던져 주고있다. 언제나 어느 시대나 똑같겠지만 이처럼 혼란한 세대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종말론에 큰 관심을 가져야 하며 말씀 안에서 종말에 처한 우리의 삶의 자세를 확고히 가져야 한다.

⑵ 종말 성도들의 생활은 어떠해야 하나?

어떤 분은 우리 주님은 그저 평범한 우리의 생활 속에 재림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날그날 성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어 나가면 된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내일 세상의 종말이 와도 나는 오늘 사과 나무를 심는다'는 안일한 삶의 자세를 권장하기조차 한다. 정말로 종말을 대비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래도 되는 것인가? 시대의 징조야 어떻게 나타나든,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그런 일에는 무관하고 그날 그날의 생활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인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언제 주님이 오셔도 그 주님을 영접하여 공중으로 휴거 될 수 있는 신앙적인 생활을 지금도 하고 있으며 또 앞으로 계속 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러나 성경적인 증거는 종말을 당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같은 안일한 생각에 젖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경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일에 대하여 주님은 노아 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예로 들어 경종해 주셨다. 노아 시대에 어찌 노아와 그의 여덟 식구만이 하나님의 백성이었겠느냐. 그러면 그 당시 노아의 여덟 식구 외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왜 홍수 심판의 표적이 되어 멸망을 당했겠는가?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하셨다(마 24:38,39).

주님의 이 말씀은 결코 이방인들의 생활상을 말씀해 주고 있음이 아니다. 노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경종을 들려주었는데도 그 경종을 외면하고 사과나무를 심으면서 세상적인 기복 생활에 열심을 냈던 그 당시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활상을 지적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는 흥미로우면서도 종말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엄중한 경종이 되고 있다. 주님을 신랑으로 기다리던 열처녀들 모두가 신랑이 더디오므로 인하여 '졸며잤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종말에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밤중에 소리"를 듣고 깨어나 주 재림의 준비를 서둘러 야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처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그리고 주님은 누가복음에서도 주의 재림에 관한 모든 징조를 말씀하신 후 결론적으로 이처럼 경종하신 것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임하리라 이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올 이 모든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눅 21:34-36).


⑶ 종말의 하나님의 종들에게 주어진 사명

그러면 이처럼 세속에 물든 종말의 성도들을 신앙적인 경성으로 깨우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인가? 이 일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종말에 관한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으면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는 말씀을 주셨다. 여기서 사도 요한이 지적한 이 예언의 말씀이란 하나님의 어떤 계시를 의미하는 것인가. 물론 광의적(廣義的)인 면에서 볼 때, 성경 전체의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사도 요한이 이곳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는 바는 자신이 받은 종말에 관한 "그리스도의 계시"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복이 있다는 말씀은 주 재림때 그를 신랑으로 영접할 수 있는 복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요한계시록"을 가르치는 일은 필수적인 사명이다. 이 사명에 등한히 하는 종들에 대한 엄중한 경종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주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 이 땅에 오실 일에 대한 모든 징조와 성도들이 이를 준비해야 할 일에 대한 말씀을 마치신 후, 종말에 그의 양떼들을 맡은 두 종류의 종들에 대한 언급을 잊지 않으셨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들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 을 보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고 하셨다(마 24:45-47).

우리가 여기 있는 이 말씀만을 본다면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들이 그 주인에게서 맡은 사람들에게 먹여야 할 "때를 따라 나눠줄 양식"이 무엇인지 분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에서 그 뜻을 분명히 하셨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고 하신 말씀을 들을 때, 왜 이 종은 악한 종이란 정죄를 받았는가 하면 이들은 주 재림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악한 종은 주인으로부터 양육을 의뢰 받은 양 무리들에게 주 재림을 준비시키는 "이 예언의 말씀"에는 전혀 무관심하였고 다만 이 세상 생활에 만족케 하는 세속적인 목회, 다시 말하면 기복적(祈福的)인 목회에 전념했다는 사실을 바라보게 된다. 그들의 목회에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란 기도의 제목이 있을리가 없다. 그들에게 "요한계시록"은 덮어둔 책으로 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들 주변에는 시한부 종말론 자들이 활개를 치면서 사단의 최종적인 미혹의 손길로 교회에 침투하고 있지만 "이단"이다, "잘못되었다"는 말 한마디로 만사는 끝난다.

그들의 입은 계속적으로 꿀 먹은 벙어리 격이다. 세월이 지나가면 사실이 밝혀지겠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두고도 세월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서 그 해답을 얻기를 바라는가? 계시록 22장에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밖에 머물러 있을 자들에 대하여 "개"들이란 말이 나온다. 이 개들이란 짖지 못하는 개를 의미하며 이사야를 통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셨다.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 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고 경종하고 있다 (사 56:9-11).

이것은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과 맥을 통한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고 하셨는데 그들은 세상적인 모든 일에 부요하므로 영적인 면에서도 부요한 줄로 알았지만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심령을 살피시는 주님의 눈에는 가장 가련하고 곤고한 자로 보이셨던 것이다.

⑷ 요한계시록을 연구해야 할 목회자의 자세

목회자는 "요한계시록"과 친근해야 한다. "펴 놓인 책을 꿀 송이 처럼"먹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목회자들의 발걸음을 주춤하게 하는 문제가 있다. 이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연구하고 가르치느냐? 는 것이다. 저자는 많은 목회자들로부터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려면 어떤 책을 참고로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자는 어떤 책이란 말을 구체적으로 지적해 줄 수 없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책은 많은데 그 책을 선별해서 어떤 책이라고 지목해 줄 만한 책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계시록을 연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적인 방법인데 이 성경 적인 방법이란 문제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다. 아마 저자의 경험으 로는 요한계시록을 오래도록 정독하는 가운데 성경 전체의 내용과 병행하여 요한계시록을 우리에게 주신 본래의 뜻을 따라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 아닌가 한다.

목회자들이 양 무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단장을 시키는 막중한 사명을 받았다면 그들 자신이 먼저 그 사명자의 자격을 갖추고 그 위치를 지켜야 한다.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종들은 그 이마에 인침 받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이 되어야 하는데 이들의 자격에 대하여 계시록 14장에서는 이처럼 다섯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다.

㉠ 신앙의 정절을 끝까지 지킨 종들

㉡ 어린양의 인도하심만 따라 목회 하는 종들

㉢ 순교적인 사명을 가지고 목회 하는 종들

㉣ 입에 거짓말이 없는 종들

㉤ 흠이 없는 종들이라고 했다(계 14:4,5).


이같은 사명 의식을 가지고 요한계시록을 깨닫기를 위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다면 그리고 연구에 전심을 쏟는다면 그같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성령께서 바른 연구로 인도하실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2. 종말론과 부활과의 관계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일에는 여러 가지 장애점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장애 요소가 되고 있는 사건이 "첫째 부활과 천년왕국"문제이다. 저자는 여기서 종말론 해석에 큰 장애 요인이 되고 있는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오랫동안 연구한바 그 상세한 내용을 이곳에서 밝히기로 한다.

부활은 인류의 최 종말에 있을 대 사건이다. 부활이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은 부활이 바로 성도들의 구원의 완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구원은 몸의 구속으로 완성된다. 부활되기 이전까지의 그리스도인의 구속은 영의 구속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또 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 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하였다(롬 8:23). 기독교에 있어서 부활이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을 보면 복음의 핵심이 이 부활에 있음을 찾아 볼 수 있다."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 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증거하고 있다(고전 15:12-19).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부활이지만 이 부활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가 일치점을 보이지 못하므로 그리스도인들로 이 부활에 대한 소망에 혼선을 갖게 하고 있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신학계에서는 이 문제를 속히 해결하여 성도들로 부활에 대한 올바른 소망을 갖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부활에 관한 여러 견해를 찾아보려면 종말론적인 면에서 천년기 설과 결부시키는 것이 가장 무난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⑴ 후 천년기 설의 부활론

종말론에 있어서 후 천년기 설이란 천년왕국을 문자적으로 해석 하지 않고 복음의 편만(遍滿)으로 말미암은 온 세계의 복음화 된 사회상을 천년왕국으로 보는 일종의 상징적 견해이다. 이같은 해석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성경은 이같은 후 천 년기 설 주장을 부정하고 있으며 인간이 꿈꾸는 하나의 이상적인 사회를 복음 전파와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사회 개혁을 외치는 민중 신학과 일맥상통하는 면을 보이고 있다.

이들의 종말관에 있어서의 인류의 부활은 매우 단순하다. 마지막 시기, 즉 천년기가 지난 후, 이 세상에는 배도의 세력이 등장하게 되고 주의 재림으로 이 세력을 무찌르며 이 때 죽은 자들의 대 부활과 살아 있는 성도들의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후 천년기 설에 대한 부활론을 도표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복음 전파시대 종말까지
복음이 세상에 편만함과 함께
악은 감소되고 선이 점증하며
드디어는 온 세계가 의와
평화의 세계를 이루게 됨
(이것이 천년왕국의 도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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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천년기 설 부활관 도표>


이 경우 부활은 다음 단계로 실행된다.

① 단회적인 부활이다.

② 모든 성도들이 일시에 신령체로 변화 받는다.

③ 산 자와 죽은 자의 모든 부활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들이 말하고 있는 부활론은 무 천년기설의 경우와 동일하다. 후 천년기 설의 경우 그들의 주장과 같이 이 세상이 복음으로 "의와 평강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면 왜 그 후에 배교 사건이 일어나는지? 그 배교 사건의 양상이 어떠한지? 에 대한 해답이 없다. 그리고 부활론에 있어서도 첫째 부활에 대한 해석이 없고 첫째 부활과 마지막 부활에 대한 차이점이 불분명하다.

⑵ 무 천년기 설의 부활론

무 천년기 설은 문자 그대로 천년왕국설을 부인하는 견해다. 그들은 계 20:2절에 있는 일 천년을 지상 교회의 전 시대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사단을 일 천년간 무저갱에 결박하여 가두는 일을 신약 시대에 있어서의 사단의 활동의 제한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첫째 부활에 대해서는 영적인 새 생명의 탄생으로 중생의 경우와 영이 육체를 떠나 천국으로 가는 경우, 두 가지 중 하나를 가리키며, 이들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한다는 말을 천상 교회에서의 성도들의 복된 생활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이들의 주장을 도표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대 환 난 시 대
(교회시대를 환난시대로 본다)
배 교 사 건

그 리 스 도 의 재 림

대 부 활
대 심 판
영 원 한 천 국

<무 천년기 설 부활관 도표>


① 무 천년기 설에서는 성도들의 공중 휴거 설을 인정치 않는다.

② 첫째 부활은 영적인 부활이요 인류의 종말에 죽은 성도들은 일시에 부활한다.


무 천년설의 문제점은 첫째 부활의 해석에서부터 나온다. 부활이란 말은 죽은 자가 다시는 죽지 아니하는 신령한 몸으로 살아나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들은 첫째 부활을 영적 중생의 부활 또는 영이 육체를 벗어나는 형태로 해석한다. 신약 성경에는 문자적으로 "천년"이란 말이 계시록 20장 한 곳에만 있지만 그러나 신구약 성경에 계시된 명백한 언급과 숨겨진 천 년왕국에 대한 실현을 부인하는 일은 무 천년설의 큰 맹점이다.

⑶ 세대주의적 전 천년기 설의 경우


세대주의란 말은 세대주의 신학에서 나온 말이다. 세대주의 신학이란 성경을 해석하는 일에 성경의 전 세대를 일곱으로 등분하는 것을 주요 해석 방법으로 삼는 신학이다. 18세기 영국의 다비가 이 신학의 원조로 세대주의 신학의 창시자이다. 그런데 이처럼 성경에서 인간의 세대를 일곱으로 구분하다 보니 성경 해석상 반드시 빠뜨릴 수 없는 룰이 생기게 되는데 그것이 문자적 해석인 것이다.

문자적 해석이란 성경적 사건과 성경에 계시된 내용의 예언을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문자적인 의미에 중점을 두는 해석 방법인데 특별히 이스라엘이나 유대인과 교회에 관한 해석에 있어서 이 방법을 더욱 철저하게 적용한다. 구약에는 주로 모든 예언이 이스라엘 또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약속되어 있다. 특히 인류의 종말과 메시야 왕국에 대한 다니엘이나 선지서의 예언은 더욱 그러하다. 이것을 성경 해석에 그대로 적용시킨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계약 신학적 입장에서 성경을 연구 하고 해석하는 목회자들에게는 그들의 성경적인 해석을 그대로 수용할 수 없게 된다.

특히 이들 세대주의 자들은 종말론 해석에 이 원칙을 그대로 적용하기 때문에 "세대주의적 종말론"이라고 하는 특이한 종말론을 스스로 창안해 내게 된 것이다. 세대주의적 종말론은 전 천년기설을 주장하기 때문에 천년기 설과 결부시킬 때에는 "세대주의적 전 천년기 설"이라고 말한다. 이들의 종말론은 육적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의 해석이 계약 신학적인 견지에서 해석하는 견해와는 너무나도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이들의 해석의 특징은 요한계시록이 교회에 주시는 계시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다시 말하면 육적인 유대인들에게 주시는 계시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계시록 4:1절에서 휴거 되고 그 이 후에는 이 땅에 7년대 환난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7년 환난 기간은 교회에게 적용되는 역사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한 유대인을 위한 기 간이기 때문에 교회는 이 기간이 이르기 이전에 이 기간에서 유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이 공중 휴거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7년 환난 전에 휴거 된다는 사상은 필연적인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주장은 세대주의 종말론의 절대적인 논리이기 때문에 7년 환난전 휴거를 제외한다면 세대주의 신학은 설 땅이 없게 된다. 세대주의 종말론에는 문제점이 너무나도 많다. 예수님 생존 당시 유대인들이 그들의 메시야를 영접했더라면 그 때 메시야 왕국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하는 논법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 섭리를 무시하는 일이며,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백성들을 예정하셨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는 말이 된다.

그뿐 아니라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했기 때문에 그들의 왕국을 연기했는데 그 연기 기간을 이방인들의 구원 기간으로 삼았다고 하는 논리 역시 이방인들의 구원을 다만 유대인들의 실패의 혜택으로 돌리는 발상이 되고, 7년 대 환난 기간은 유대인들의 회개 기간으로 주시고 그들이 회개한 후, 그들에게 약속한 메시야 왕국이 그 때에 이루어짐으로 육적인 유대인들이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는 해석 역시 비 성경적이다.

① 세대주의 종말론은 7년 대환난 전 휴거설을 주장하는데 특별 한 강조점을 두고 있다.

어떤 신학자들 중에는 7년 환난이란 말이 세대주의에서 나왔다고 속단하는 사람도 있으나 7년 환난에 대한 말은 이미 1603년 미래론자의 시조인 제슈이트파의 리베라가 쓴 요한계시록 해석에서 이미 등장하고 있는 말이다.

② 세대주의 종말론에서 7년 환난 전 휴거를 주장하므로 사실상 계시록에 예언된 종말의 모든 징조의 아무런 성취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휴거 되므로 그들의 휴거 시점에 대한 판단을 성경적으로 내릴 수 없다.


"적 그리스도"의 등장이나 "한이레"의 언약의 성취를 볼 때 우리는 7년 환난의 도래를 징조적으로 깨닫게 되지만 이들의 주장은 한 이레의 언약이나 적 그리스도가 등장하기 이전에 교회의 휴거가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서 심각한 몇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되어 물의를 야기하게 된다. 그 하나는 EC의 등장으로 인한 종말 시기의 잘못된 판단이다. 그들은 EC가 1992년도 말에 통합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첫번째 대통령이 적 그리스도가 되기 때문에 교회는 그 이전에 휴 거 되어야 한다는 이론을 세우므로 시한부적 종말론을 합리화시킨다. 다음에 인류의 역사를 7천년으로 잡고 7일 안식의 법칙에 의하여 2000년이 그 끝이 되니 1999년에 인류의 종말이 오고 2000년에 이 땅에 천년왕국이 이루어지므로 7년대 환난의 기간을 제하게 되면 1992년도에는 교회가 휴거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③ 이 설의 가장 위험한 면은 요한계시록이 유대인들만을 위한 성경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이 교회와는 관계가 없는 성경이 되므로 계 22:18,19절의 예언의 가감죄에 해당되는 것이다.

④ 이들의 부활론은 교회와 유대인들과 차별을 두고 있다.

교회는 7년 환난 전 주 재림시에, 생존 성도는 변화 받아 휴거 되고 주 안에서 죽은 성도는 부활하므로 이들이 함께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7년 대 환난을 거친 다음, 생존한 몸으로 그대로 천년왕국에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 천년왕국 안에서 부활 성도, 변화 성도, 생존 성도들이 어떻게 천년 동안 융화하며 조화를 이루어 살아 나갈 것이며 육신적으로 천년왕국을 지낸 유대인들과 그 2세들은 그 후 어떻게 어떤 몸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인지, 그 때 또 홀연한 변화가 있을 것인지 선명한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에도 없는 참으로 묘하고도 이상한 나라를 창안해 내고 있는 것이다.

⑷ 상징적 전 천년기 설의 경우

우리는 전 천년기 설을 "역사적 전 천년기 설"과 "세대주의적 전 천년기 설"로 구분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 역사적이란 말의 의미가 너무나도 방대하고 그 해석의 방향이 너무나도 다양함을 알아야 한다. 역사적 해석이란 "요한계시록을 역사적 사건의 예언으로 인정하고 해석하는 견해"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한다면 세대주의적 종말론도 역사적 전 천년기 설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저자는 요한계시록을 "세대주의적 해석"과 "역사적 해석"의 둘로 구분하지 않고 "상징적 해석"과 "종말론적 해석"과 "세대주의적 해석"으로 구분한다. 또한 이것을 천년기 설로 구분할 때는 모든 천년기설은 모든 역사적 해석의 범주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후 천년기 설"과 "무 천년기 설"과 "전 천년기 설"로 나누고 전 천년기 설에 대해서는 "세대주의적 전 천년기 설" "상징론적 전 천년기 설" "종말론적 전 천년기 설"로 구분한다.

요한계시록의 상징적 해석은 성경의 예언을 공허(空虛)로 돌려버 리는 인간 지식의 상상적 작품이다. 저자는 요한계시록의 상징적 해석이야말로 시한부 종말론보다 더 나쁜 해독을 교회에 끼칠 뿐 아니라 종말에 처한 많은 성도들을 짐승의 표 앞으로 인도하므로 죽음의 표를 받게 하는 안내인의 구실을 하는 최악의 성경 해석 방법이라고 본다. 시한부 종말론은 그 시한부적 기간이 지나가면 그 거짓이 드러나고 그 생명력이 꺼져 무력해지지만 상징적 종말론의 해독은 그리 스도의 재림의 그 시기까지 이르게 된다는 점에서 그 문제점이 크다.

상징적 해석에 있어서 여러 가지 지적할 수 있는 문제가 많지 만, "제사와 예물을 금지"한다는 것을 신약 시대의 예배로 보고 두 증인의 사역을 교회의 사역으로 본다. 두 증인의 순교를 교회 시대 의 환난으로 보고 그 증인의 부활을 성도들의 부활로 보며 두 증인의 승천을 교회 휴거로 해석한다. 그러면 이들의 종말론과 부활에 관한 도표를 살펴보도록 한다.

① 상징적 해석은 종말론적 예언이나 종말에 관한 징조의 나타남이나 성취를 인정치 않고 있기 때문에 다니엘서나 계시
록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주의 재림"이 언제인가 있다고 하는 사실 한 가지뿐이다.

② 상징적 해석은 계시의 모든 면을 상징적으로만 보기 때문에 여러 갈래의 해석을 다 수용해야 한다.


상징이란 그 말의 표현처럼 분명한 목적이나 표적이 제시되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징적 모든 해석을 수용해야 할 부담을 안지 않을수 없다. 예를 들면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란 단 9:25절의 말씀 을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보고, 또 어떤 상징적 해석을 취하는 분은 '안티어쿠스 에피파네스'로 규정해 버린다. 한가지 인물을 가지고 극과 극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상징적으로 예언을 해석하는 사람은 이같은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예언의 올바른 해석이 전혀 불가능해지고 만다.

③ 상징적 해석에는 문제의 구심점이 없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예언의 말씀이라고 볼 수 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예언의 말씀은 그 예언대로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는데 그 내용이 상징적이기 때문에 상징적인 예언이 성취될 리가 없는 것이다. 가령 1260일도 상징적 숫자, 42달도 상징적 숫자, 144,000명도 상징적 숫자, 한 이레도 상징적 숫자, 69 이레도 상징적 숫자,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도 상징적 숫자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예언은 전부 상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징적 숫자의 해석이 다만 해석하는 사람의 상징적 견해를 따른다면 그런 무의미한 예언이 어떻게 하나님의 예언일 수가 있으며 그런 예언을 토대로 성경을 어떻게 연구하며 종말에 관한 징조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인가?

④ 상징적 해석에 크나큰 문제로 부각되는 일은 짐승이나 짐승의 표에 대한 상징성 문제이다.

만약 짐승의 표, 666표를 상징적 표로 해석한다면 그같은 표는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게 된다. 인류의 종말에 적 그리스도가 실제적으로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 하여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찍어 주는 표"가 짐승의 표, 666표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계 14:9-11). 그런데 만약 이표를 상징적인 것이라고 하여 이 같은 예언의 역사적 성취 사실을 무시해 버린다면 이런 일이야말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이 표를 받은 자들은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 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는 명백한 경종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계 14:10,11).

만약 짐승의 표가 상징적이라면 여기서 말씀해 주고 있는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는 지옥의 불도 상징적인 표현에 불과할 것이며, 적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아마겟돈 전쟁에서 포로로 붙잡혀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는 그 유황불 못도 상징에 불과하며, 년 후에 사단이 들어갈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 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그 유황 못도 상징에 불과하며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 망 곧 불 못이라"고 밝혀 주고 있는 그 둘째 사망인 불 못 역시 상징적인 표현에 불과할 것이 아니겠는가?(계 19:20,20:10,14).

문제가 이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축자영감설'에 의하여 해석할 것이 아니라 상징적 바탕 위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니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이다. 요한계시록이라고 어찌 다른 성경과 구별되이 상징적
으로 해석하므로 그 의미를 모호하게 흐려도 된다는 말인가. 물론 요한계시록 안에는 상징적인 표현도 많이 있다. 그러
나 표현은 상징성을 띄웠어도 그 해석은 실제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나타나야 예언이 되는 것이다. 성경에 있는 모든 상
징적 표현은 그 상징적 표현만으로 끝나 버린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된다.

상징적 표현에는 또 반드시 그 상징적 표현을 실질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는 많은 해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성경 전체적인 맥락으로 비추어 어느 것에 상징적인 해석을 가해야 하고 어느 것에 실제적 해석을 가해야 한다는 성경적 상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모든 숫자나 어떤 사건의 상징적 표현을 상징적이라고 모호하게 숨겨 버린다면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예언을 그 누가 이해할 것이며, 또 누가 깨달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이 되어 약속하신 복을 받겠는가? 아마도 상징적 해석에 뛰어난 인간적 재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거나 상징적 해석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받은 사람 외에는 전혀 불가능할 것이니 과연 그런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인가?

⑤ 그뿐 아니라 이 상징적 해석이야말로 계 22:19절에 나타난 무서운 경종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이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 하여 버리시리라"는 경종은 과연 어떤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인가? 상징적 해석은 "더"하는 일과 "제"하는 일, 이 두 가지 모두가 해당된다.

⑥ 상징적 종말론의 자가당착

상징적 전 천년설을 주장하는 어느 신학대학 교수가 저술한 "요한계시록"을 보면(268쪽) "7년 대 환난을 인정하나 문자
적으로 보지 않고 상징적 기간으로 보는 견해"라는 표제를 붙이고 아래와 같은 도표를 그려 놓았다.

위 도표에 대한 해설은 이렇게 나와 있다.

㉠ 전반부 1260일은 상징적인데 복음 전파의 전성기이다.

㉡ 1290일은 1260일보다 30일이 더 많은 기간인데 이 30일 기간이 환난 기간이다(역시 상징적 기간이다).

㉢ 1335일은 1290일 보다 45일 더 연장된 기간인데 이 기간은 기다리는 기간이다.
마태 25:1-11의 열 처녀 비유에 해당
     된다. 이 1335일에 예수님이 공중 재림한다. 그러나 이 기간은 상징적 기간이므로 실제의 날짜는 알 수 없다.

㉣ 2300주야는 1335일 이후 965일간으로 공중 재림 및 성도 휴거후 지상에서 유대인과 불신자가 대접 재앙 받는 기간
    이다.
이 2300주야 지점이 아마겟돈 전쟁 발생 일이며 모든 지상 환난은 여기서 끝난다.

㉤ 220일은 모든 환난이 끝난 후 새들의 잔치로 시체를 정리하고 청소하는 기간이다. 이 기간이 끝나면 휴거한 성도와
    주님이 재림하여 천년왕국에 들어간다. 천년왕국에 들어가는자들은 육신을 가진 유대인과 이방인 일부가 들어간다.

문제점

㉠ 위 도표를 보면 많은 날짜가 기간별로 열거되어 있다. 이 기간들이 왜 위 도표와 같이 열거하게 되었는지? 그 분명
    한 의미가 명시되지 않고 있다.

㉡ 열거된 모든 숫자적 표현을 상징적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러면 그 숫자들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상징인지 명확
    한 해답이 전혀 없다.


㉢ 30일, 45일, 965일, 220일 들의 날수들이 상징적이라면 그 날짜들의 사이에 개재되어 있는 간격이 왜 그러한 숫자가
    아니면 안되는지 그 해답이 없다.

㉣ 전반기 1260일 기간은 복음 전파의 기간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후 30일간의 기간은 환난 기간으로 해
    석해 준다. 그러면 이 환난 기간은 종말적인 환난 기간인지? 아니면 교회 시대의 환난 기간인지? 명백하지 않으며, 만약     교회 시대의 환난 기 간이라면 1260일에 포함되어 있어야 할 터인데 왜 신약 시대와는 별도로 30일이 계산되었는지 모
    르겠다.


㉤ 그 후 45일간의 기간이 나오는데 이 기간을 열 처녀의 비유에 적용시켜 기다리는 기간이라고 해석해 준다.
그리고 그
    기다리는 기간의 마지막 시점인 1335일에 예수님이 공중 재림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경악하는 일은 상징
    적 해석자들은 예수님 의 재림을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으로 양분하는 이중 재림 설을 주 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주장이야말로 세대주의적 종말론자들이 주장하는 종말론의 모순이며, 근래에 머리를 쳐들고 있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7년 환난 전 휴거 설과 일맥상통하는 묘한 종말관이 아닐 수 없다.

㉥ 예수님의 공중 재림 후에 계속되는 965일간은 예수님의 공중 재림 및 성도들의 휴거 후 지상에서 유대인들과 불신자
    들이 받는 대접 재앙 기간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 마지막 시점인 2300주야 지점이 아마겟돈 전쟁 발생 일이며 모든
    지상 환난은 여기서 끝난다고 말하고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예수님이 공중 재림하시고 성도들이 휴거된 후에도 지상
    에는 965일과 220일간의 역사가 계속되는데 이 시기는 종말적인 무서운 환난이 계속되는 시기가 된다. 물론 이 기간도
    이들의 해석에 따르면 상징적이다.


    그렇다면 이 상징적인 숫자의 기간이 혹 7년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이
    해석은 7년 환난 전 휴거 설을 주장하는 세대주의적 종말론과 같은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이들은 세대주의
    종말론을 정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성도들의 휴거가 주의 재림 전에 있다면 이것은 그들이 우려하는
    시한부 종말론이 되어 버리고 만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휴거 된 후, 965일과 220일 후에 예수님이 지상 재림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965일과 220일까지도 상징적 기간이라면 도대체 이같은 도표는 무슨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이
    같은 상징적 숫자의 배열은 무슨 필요로 연구되고 발표되는 것인가?

㉦ 그리고 220일간을 환난이 끝난 후 새들의 잔치로 해석해 주고 있는데 도대체 이 220일은 어디서 나온 숫자인가?
    경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의 지상 재림 전에 공중 재림이 있다는 구절을 찾을 수 없고 성도들의 공중 휴거 후에도 지상
    에 인류의 역사가 계속된다는 사실을 찾을 수도 없다.


㉧ "7년대 환난을 인정하나 문자적으로 보지 않고 상징적 기간 으로 보는 견해"란 말에서 비록 상징적 기간으로라도
    7년 대 환난을 인정한다는 말은 "7년 환난"이란 기간이 성경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자들을 "육신을 가진 유대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구약에 명시된 메시야 왕국에 대한
    문자적 해석이기 때문에 이같은 해석은 구약의 이스라엘을 교회와 구분된 육적 이스라엘로 해석하는 세대주의적 해
    석과 동일한 해석이 되므로 세대주의 종말론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 요한계시록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의 부활론을 보면 너무나도 세대주의적 신학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세대주의 신학과 세대주의 종말론을 가장 예리하게 비판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상
    징론적 해석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주장하는 부활은 어떠한가?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모든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며
    살아 있는 모든 성도들도 홀연히 변화 받아 공중으로 휴거 된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육적 이스라엘에 대한 부활이나 변화는 없고 그들이 살아 있는 그 육체를 그대로 지닌 채 천년왕국에
    들어가 왕국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해석이다.이같은 부활론은 바로 세대주의 신학에서나 취해야 할 학설이다. 왜냐하
    면 세대주의 신학에서는 성경의 이스라엘이나 유대인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육적 이스라엘이 천년왕국의
    백성들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구약에 나오는 메시야 왕국 백성들은 바로 이스라엘이나
    유대인들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이같은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7년 환난 전 휴거설"을 주장하고 계 4:1절에서의 교회의 휴거를 주장
    하고 또 요한계시록을 유대인들을 위한 성경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같은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상징론적 해석자들이 유대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세대주의자들의 지론인 유대인들만의 천년왕국에서의
    특권을 세대주의자들과 똑같이 주장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모순된 일이다.

    거기다 세대주의 자들보다 한 술 더 떠서 유대인들을 보필하여 일해 줄 이방인들인 불신자들의 얼마간의 수효도 천년
    왕국에 유대인들과 함께 참여한다는 일부 주장에 대해선 아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요한계시록을 어
    떻게 하자는 것인가? 어디까지 이 모양으로 끌고 갈 작정인가? 요한계시록에서 그 무엇을, 그 어떤 것을 우리에게 가
    르쳐 주려는 심산인가?


⑸ 종말론적 전 천년기 설의 경우


"종말론적 전 천년기 설"이란 말은 전 천년설에 있어서 아직까지 "역사적 전 천년기 설"과 "세대주의적 전 천년기 설"로 양분된 것 이 해석상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역사적 전 천년설을 상징론적 전 천년설과 종말론적 전 천년설로 양분하므로서 계약 신학적인 입장 에서 종말론 해석의 방법을 두 가지로 나눈대서 나온 말이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역사적 전 천년기 설이라고 말하면서도 요한 계시록의 내용을 역사적 사건의 예언으로 사실상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징론적 전 천년설과 구별시키는 계약 신학적 입장에서의 종말론적 전 천년설의 정립이 시급하다고 생각해 왔다.

계약 신학적인 입장에 서서 요한계시록을 세대주의적도 아니고 상징론도 아닌 성경 그대로의 종말론적 견지에서 해석하는 이 일이 참으로 중 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같은 "종말론적 전 천년기 설"을 체계화하여 1987년 이래 전국 목사님들에게 계속 강해 해 오고 있다. 그런데 이 일에 비판을 가하는 분들도 있는데 이유인즉 7년 환난을 인정하는 일은 세대주의적 해석을 취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세대주의는 이단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의 요한계시록 해석도 이단이라고 보면 절대로 안 된다. 다만 그 해석에 있어서 성경 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뿐이다. 그것도 계약 신학적인 입장에서 그 렇다는 것이다. 물론 세대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의 주장이 절 대 타당성이 있는 성경적인 해석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7년 환난의 경우, 이 낱말은 결코 세대주의 신학의 창작품이 아니다. 종 말에 대한 성경적 예언으로 분명히 성경에 명기된 하나님의 말씀 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7년 환난"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도 세 대주의 자들이 그 시발점이 된 것이 아니다. 세대주의 신학과 세대 주의 종말론은 18세기에 들어와서 영국의 다비에 의하여 정립되었 지만 "7년 환난"이란 술어는 이미 그 보다 2세기 전인 16세기초에 미래론 자의 '제슈이트파'의 '리베라'에 의해 그의 계시록 해석에서 적용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전술한 바와 같다.


① 요한계시록은 종말론적 사건의 계시이다.


필자는 요한계시록을 여러 번 정독하는 중에 요한계시록은 그 주 제가 "주의 재림"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요한계시록은 주 재림 에 관한 계시와 예언과 징조에 관한 사건만으로 일관되었다는 사 실을 간파했다. 그리고 주 재림에 대한 그 날짜와 시기에 대해서는 절대 비밀로 감춰 두고 있지만 주 재림에 관한 징조로 7년 환난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같은 계시는 구약에서는 유대인들의 환난의 시기를 통해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도들의 예언의 사역을 위한 회개의 기간을 통해서 실로 여러 가지 형태로 거듭 거듭 말씀해 주고 있다.

② 7년 환난 설은 세대주의적 입장이 아니다.

종말론적 전 천년설에서 "7년 환난"을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한다고 하여, 세대주의적 입장을 따른다고 생각 하면 큰 오해요 착각이다. 우리가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경계하고 있는 이유는


㉠ 7년 환난 전 공중 재림설과 휴거설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7년 환난 전 공중 재림 설은 자연히 주 재림을 둘로
    나누게 된다.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이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이중 재림은 성경 어느 곳에도 없다.

㉡ 그리고 세대주의 종말론에서는 교회의 휴거를 7년 환난 전으로 공식화하므로 7년 기간의 환난 기간을 유대인을 위한
    회복기간으로 인정한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해석이 위험한 이유는 교회는 이 땅에서 전 3년 반을 통과하며 그 기간 동
    안 적그리스도에 의한 많은 핍박을 받게 되는데 이 사실이 감추어지므로 결과적으로 교회가 이 적그리스도에 의한 피
    해를 가장 크게 받는데서 오는 엄청 난 손상을 입게 된다는 사실이다.


㉢ 그리고 다른 또 한 가지는 종말에 관한 징조는 7년 환난의 시기로부터 오는데 교회의 휴거 후에 이같은 환난이 세상
    에 온다고 믿기 때문에 세대주의 종말론은 시한부 종말론의 온상이 되고 있으며 요즘 EC의 통합 논의에서 오는 성급한
    판단 같은 것으로 인류의 종말의 시기를 예언하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③ 7년 환난설은 결과적으로 시한부 종말론이 되는가?

어떤 사람들은 7년 환난을 인정하게 되면 "시한부 종말론"이 된 다고 우려하기조차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일삼는 사람은 시한부 종말론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잘 모르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시 한부 종말론이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주의 재림의 시기를 예언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앞으로 언제인가 종말이 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종말이 성경에 계시된 예언의 말씀대로 임하게 될 것이다.

예언의 말씀대로 임한다는 말은 주의 재림 시기에 가서 성경에 종말적인 징조가 반드시 나타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아무런 징조도 없이 재림하지 아니하신다. 그것이 단 9:27절 에 있는 적 그리스도에 의한 "한 이레"의 언약이고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의 예언 사역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한 이 레"의 절반에 나타나는 유대인의 종교적인 핍박은 후 3년 반에 들어선 징조로 임한다. 그런데 그러면 이같은 징조가 실제적으로 우 리의 현실 앞에 나타난다고 하면, 그 시기로부터 7년 후면 인류의 종말이 찾아 올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시한부 종말론이 아니겠느냐? 는 주장이다.

④ 한 이레의 출발 시기가 성경에 없기 때문에 시한부 종말론이 될 수 없다.


성경에는 "한 이레의 언약"이란 언급밖에 없다. 그 언약의 성취 될 시기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성경적인 종말의 징조적 시기"라고 부른다. "장차 적 그리스도에 의해 한 이레의 언약이 성취되면 종말에 이른 징조적 시기에 이르렀다"고 하는 성경적 견해가 7년 환난 설을 인정하고 있는 사람들의 종말관이다. 이 같은 견해가 왜 시한부 종말론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주님이 언제 오신다는 년, 월, 일의 거론 없이 성경에 있는 종말론적 징조를 논하는 것도 시한부 종말론인가?

⑤ 적 그리스도의 등장은 이미 인류 종말의 시한부적 경종이다.

성경에서는 적 그리스도의 등장과 인류 종말의 시기에 대하여 분 명한 언급이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고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 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 시리라"(살후 2:1-4,8).

"저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 리니"란 말씀에서 인류의 종말에 임박해서 적 그리스도가 등장하 며 그가 등장할 때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 가 그 앞에 모임에(휴거) 관하여" 곧 임박한 줄 알고 준비해야 한 다는 경종이시다. 그리고 적 그리스도의 등장 모습에 관하여 계시 록 13장에서 자세히 언급해 주고 있다.

㉠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적의 인물이다(계 13:3,4).

㉡ 42달간 세계를 지배하는 인물이다(계 13:5).

㉢ 자신의 우상을 만들어 인류들로 구 우상 앞에 경배시키는 인물이다(계 13:15).

㉣ 인류들로 그 우상에게 경배케 하므로 짐승의 표를 받게 한다(계 13:16).
만약 "한 이레의 언약"을 시한부 종말로 규
    정한다면 적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이 되는 마흔 두 달간도 시한부 종말이 될 것이다. 이런식으로 성경의 예언을 비판한
    다면 인류의 종말에 관한 예언 그 자체를 매도하므로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
    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란 말씀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종말적인 예언의 성취에 대하여 무조건 부인하는 처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벧후
    3:3,4).


⑥ 적 그리스도는 인격적인 단일 인물이 아닌가?

계시록 13장의 짐승은 종말의 단일적인 적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 니라 역대의 적 그리스도의 복합적 인물들이라고 주장하는 신학자 들이 많이 있다. 그 이유로는 2절에 나와 있는 "표범" "곰" "사자"들의 짐승들이 단 2,7,8장에 나와 있는 역대의 나라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 러나 우리는 계 13장을 문장적으로 자세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 1,2절의 짐승은(바다에서 나온 한 짐승이다).

㉡ 3절의 인물은(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은 인물이다).

㉢ 1,2,3절의 짐승은 5절의 인물(마흔 두 달 일할 권세 가진 자와 동일 인물이다).

㉣ 1,2,3,5절의 짐승은 14절의 인물(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과 동일 인물이다).

㉤ 1,2,3,5,14절의 짐승은 15절의 인물(짐승의 우상에게 경배케 하는 그 대상과 같은 인물이다).

㉥ 14:9-11절에 나오는 짐승(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은 계 13:1,2,3,5,14,15절의 인물과 동일 인물이다.

㉦ 17:8절의 짐승(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은 계     13:1,2,3,5,14,15절의 인물과 동일 인물이다.

㉧ 17:11-14절의 짐승(여덟째 왕, 짐승은 계 13:1,2,3,5,14,15,17:8 절의 인물과 동일 인물이다.

㉨ 19:9절의 짐승(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은 계 13:1,2,3,5,14,15,17:18,11-14의 인물과
    동일 인물이다.

㉩ 19:20절에서 재림하시는 주님과 싸우는 짐승(짐승이 잡히고) 은 계 13:1,2,3,5,14,15,17:8,11-14. 19:19절의 인물과 동
    일 인물이다.


㉪ 20:10절의 짐승(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괴로움을 받으리라)은 계 13장의 적 그리스도와 동일 인물이다.
위와 같은 모든 사건의 배열이 명명백백하거늘 어떻
    게 적그리스도가 인류의 종말에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할 단일 인격체가 아니며 그가 통치하는 기간으로 계시된 42달간
    이 어떻게 전 교회 시대 (2천년간)가 될 수 있다는 말인지? 좀 분명하고 설득력 있게 밝혀 주었으면 한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앞에 우리의 교만과 억지와 고집과 강변을 버려야 할 것이다. 만약에 우
    리가 살아가고 있는 역사의 어느 시점에 이르러 성경에서 예언해 주고 있는 이같은 징조가 틀림없이 나타난다면 그것
    은 우리가 경계하고 배척해야 할 "시한부 종말"인것이 아니라 종말에 이르렀다고 하는 하나님의 경종이요, 실제적인
    긴박한 상황인것이다.

    적그리스도가 등장하고 적그리스도에 의한 "한 이레의 언약" 이 성취되고 권능 받은 두 증인의 예언의 사역이 우리들
    현실앞에 나타나 우리들에게 종말의 예언의 징조로 분명히 나타나 보여주는데도 그 때 그 상황을 "시한부 종말"이란
    말로 매도할 수 있겠는가? 7년 환난설을 "시한부 종말론"으로 공박하려면 지금 이 시기가 아니라 그런 사건이 역사적
    현실의 무대 위에 실제로 등장하여 어느 누가 "이제 적그리스도가 등장하고 한 이레의 언약의 성경적 예언이 성취되
    었으니 이제 우리는 7년 환난 중에 들어와 있다"고 외칠 그 때에 그들과 대항하여 "아니다 적그리스도는 등장하지 않
    으며 짐승의 표도 거짓말이며 7년 환난이 왔다는 말도 거짓말이다. 이같은 시한부 종말론에 미혹 받지 말고 내일 예수
    님이 오시더라도 우리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외쳐야 할 것이다. 여기서 종말론적 입장에서 본 종말의 진
    행과 종말론적 견해에서 보는 부활을 도표로 알아보도록 한다.


⑦ 다니엘 2:31-34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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